아름다운사회

경남 거창 서덕 들판: 해바라기의 꿈

경남 거창 서덕 들판: 해바라기의 꿈

by 강판권 교수 2016.10.17

가을 황금 들판은 나의 고향이다. 도시에 산 지도 35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가을의 들판을 바라보면 늘 그립다. 그래서 가을에는 들판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 들판을 바라보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단순하지 않다. 가을의 황금 들판에는 농부들의 아픔과 고통이 벼 이삭만큼이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황금 들판이 만들어지기까지 농부들은 셀 수 없는 발걸음과 시간과 정성을 투자했다. 그러나 해마다 들판은 가을마다 황금색으로 물들지만 농부들의 마음은 언제나 검은색으로 변한다. 벼 수확에 대한 대가가 농부들의 노력에 비해 늘 낮기 때문이다. 올해의 벼 수매 가격은 예년보다 결코 높지 않을 전망이다.
벼농사는 쌀 소비가 날로 줄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급기야 정부에서도 절대농지를 다른 용도로 전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시대가 바뀌면 정책도 변할 수밖에 없다. 쌀 소비가 줄면 당연히 벼농사 면적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농토는 간단히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한 번 절대농지를 다른 용도로 바꾸면 다시 농토로 만들 기회는 거의 없다. 더욱이 볏논은 중요한 습지 중 하나다. 절대농지가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습지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습지가 사라지면 생태계의 변화는 피할 수 없다. 아울러 혹 지구상의 큰 변화가 닥치면 우리나라의 양식은 어디서 얻을 지도 의문이다. 벼농사와 관련한 이러한 내 생각은 농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이다. 농토는 쌀 생산과 소비로 평가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의 서덕마을의 들판은 내가 만난 들판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올해 여름 거창의 친구 덕분에 처음 찾은 서덕 들판은 내 고향에서 만나지 못한 넓은 면적이었으며, 산과 어우러져 환상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최근 개봉작 ‘귀향’의 한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나는 서덕 들판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해 한 달 뒤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정자에 올라 해를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를 쫓아 들판을 바라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린 시절부터 만났던 들판이거니와 들판에서 보낸 시간이 아련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비 오는 어느 날, 또다시 서덕 들판을 찾았다. 이날은 정말 비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비를 좋아한다. 비는 언제나 그리움을 내려보내기 때문이다. 오후에 출발해서 서덕 들판에 도착하니 벼들이 비에 젖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자 옆의 코스모스는 만개해서 청초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비 오는 날 코스모스와 서덕 들판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바람과 바람 사이,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죽도록 머물고 싶었다. 한참 동안 서덕 들판을 걸었다. 누군가 손을 잡고 걷어도, 굳이 손잡을 사람이 없더라도 들판 가운데 서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나는 해 질 녘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산 그림자가 들녘을 품는 장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벼들은 하늘을 이불 삼고, 구름을 베개 삼아 하루의 피곤을 풀지도 모르지만, 산 그림자는 아마도 포근한 이불이리라. 이처럼 서덕 들녘은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는 꿈의 궁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