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시골 소도시의 가을풍경

시골 소도시의 가을풍경

by 권영상 작가 2016.10.13

차로 십여 분 거리에 떨어진 백암에 나가 형광등을 샀다. 껌벅거리던 거실 불이 급기야 나갔다. 그 덕에 어젯밤 저녁 식사는 오랜만에 촛불 아래에서 했다. 철물점에서 형광등을 사고, 점심으로 국밥을 들었다. 음식점을 나서려니 가을볕이 눈부시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 차를 세워둔 개울둑까지 걸어 나왔다. 시골 소도시의 전신주 위로 흐르는 한 소쿠리 구름이 파란 하늘빛 탓에 오히려 눈이 아릴 만큼 환하다.
저쯤 개울둑에 노란 천막이 처져 있다. 천막 아래에 엄마랑 아기가 보인다. 어쩌면 가을 빛바라기를 하러 나왔는지 모르겠다. 푸른 하늘빛이 욕심났거나 개울가 고즈넉한 풍경이 탐났거나 아니면 보송보송한 가을 햇빛이 탐났겠다.
개울둑 길 오른편은 진천행 한길을 끼고 가게와 빌딩들이 섰다. 그리고 이쪽 개울 건너편은 야산과 농가다. 소도시가 좋은 까닭이 있다. 도시풍과 농촌맛을 함께 다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한쪽 창문을 열면 도시고 또 한쪽 창문을 열면 시골이다.
개울물에 떨어진 햇빛이 반사되어 내 눈을 쏜다. 그러고 보니 개울물이 풀숲 밑으로 숨어 흐른다. 맑다. 맑다 못해 날아갈 듯 가볍다. 손등에 떨어지는 햇살도 그렇다. 벌레 한 마리 곰실곰실 기듯 손등을 간질인다.
개울둑 비탈에 바랭이 풀씨가 익는다. 강아지풀이며 도깨비 풀, 꽃대를 길게 세워 올린 부지런한 소루쟁이도 씨앗을 익히고 있다, 토끼풀 곁을 지나며 보니 천막 그늘에서 엄마와 아기가 책을 읽고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추어 물끄러미 그들을 봤다. 아기가 글을 따라 읽다 말고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씩 웃는다. 손에 들고 있던 토끼풀 한 가지를 내게 불쑥 내민다. 나는 얼른 받았다. 주머니를 뒤졌다. 시장을 둘러볼 때 재미로 산 똘똘이 스머프가 있다. 그걸 내밀었다. 아기가 자기 엄마를 흘끔 보더니 함빡 웃으며 받는다. 깨끗한 아기 웃음 값으로 치자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아기에게 손인사를 하고 걸어오는데 둑 아래 한 길씩이나 키가 큰 가지밭이 나왔다. 가지를 따시던 분이 나를 돌아다보며 “가지 좀 드릴까요?” 한다.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상품성 없는 가지라며 이쪽 개울둑에 선 내게 하나씩 던져 올리신다. 하나를 던지고, 또 던지고, 내가 받고, 또 놓치고. 그렇게 내게 네 개의 가지를 던져주셨다. 자주 가지가 꼭 떡볶이 떡처럼 가늘고 기름하다. 내 얼굴 어디에 밤골에 내려와 혼자 밥을 지어 먹는 표가 나는 모양이다.
나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지만 내겐 드릴 게 없다. 화나게 할 걸 알면서도 ‘가지값을 좀 드릴까요?’ 그때 나는 그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돈 받자고 드리는 거 아니라오.”
결국, 나는 그 말을 듣고 말았다. 몇 번이나 인사를 드리고 세워둔 차로 왔다. 내가 가지고 다니던 목캔디 한 움큼을 들고 다시 그분에게로 갔다. 둑 아래에서 일하시는 그분에게 목캔디를 보이자, 그분이 윗주머니에 넣어온 사탕을 내게 보이신다. 그냥 드리고 싶어 드렸으니 괘념치 말라며 가지 하나를 또 던져주신다.
이 작은 소도시의 건물들 위로 가을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내게 웃음을 보여준 아기며, 가지를 던져주시던 시골어른의 순박한 인정이 모두 가을볕처럼 환하고 고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