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추억, 헌다

추억, 헌다

by 강판권 교수 2016.05.30

윤택한 삶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바쳐야 실현할 수 있다. 누구나 윤택한 삶을 꿈꾸지만 실현할 수 없는 것은 대부분 삶의 방향을 자신보다 다른 곳에 두기 때문이다. 만약 윤택한 삶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충(忠)’을 실천해야 한다. 충은 자신의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바치는 것이라 오해한다. 예수와 석가 같은 인류의 사표(師表)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들은 충을 실천한 사람이다. 후손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결국 자신을 위한 충이다. 돌아가신 분에게 차를 바치는 ‘헌다(獻茶)’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바친 것이 넘칠 때만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바치는 것은 언제나 숭고하다.
나는 다시 한 잔의 차를 바치기 위해 밀양 추원재로 떠났다. 추원재는 내가 고향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내가 이토록 이곳을 자주 찾는 것은 추억 때문이다. 추억은 그리움을 발효시킨다. 그리움은 다시 추억을 잉태한다. 그리움으로 탄생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내가 자주 추원재로 떠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시간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다. 나는 추원재로 가는 길에 초봄에 만났던 단장면 이팝나무의 꽃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입하가 지났는데도 이팝나무에는 가장 높은 곳에만 꽃이 피었을 뿐이었다. 이팝나무를 품고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보니, 겨울부터 함께 한 추억이 꽃 그림자에 숨어 있다. 이팝나무 앞에 빈 찻잔을 놓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나니 실록을 스쳐온 바람이 잔을 데운다.
중심은 언제나 자신이다. 추원재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입구의 느티나무가 길손을 반긴다. 점필재 선생의 흉상 앞 토끼풀도 여전히 깡총하다. 추원재의 낮은 문으로 들어가는 차인(茶人)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욱 우아하다. 추원재 마당에는 초봄보다 한층 자란 풀들이 불청객의 발자국소리에 고개를 내민다. 이 날은 추억을 더듬으러 다락방에 오르지 않고 마루에 마주 앉아 다회(茶會)를 열었다. 차를 우려내는 손길 사이로 쌍계 녹차 밭의 이슬이 영롱하게 빛난다. 한 잔의 차를 마시고 마당의 감나무 가지 사이로 마루에 앉은 차인을 바라보니 천사가 내려앉은 듯하고, 모과나무의 가지 사이에 찻잔을 놓으니 차인의 맑은 웃음이 부드럽게 입 맞춘다. 다회는 마당에 나무 그림자가 가득할 때까지 이어졌다.
숙명은 운명의 고향이다. 추원재 뒤편 점필재 선생의 묘소가 소나무 그늘에 안긴 시간에 한 잔의 차를 바친 것도 숙명이다. 묘소에서 내려오는 길에 찔레꽃 향기에 잠시 취했다가 다시 추원재의 옆문으로 걸어가니 단풍나무의 열매가 석양에 붉게 물들고 있다. 아쉬워 다시 추원재 안으로 들어가 마루에 마주 앉으니 추원재의 추억이 ‘주홍글씨’로 남아 산 그림자가 추원재를 완전히 덮을 때 꼼짝할 수 없다. 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을 느낀다. 추원재를 나서면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건너편 연못으로 발길을 옮겼다. 풀로 가득한 연못의 둑에서 바라본 추원재가 낯설다. 그래서 추원재의 추억은 언제나 나를 유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