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지서 일군 삶터
승지서 일군 삶터
by 이규섭 시인 2016.05.27
청산이 푸른 이마를 드러내고 말갛게 웃는다. 공기는 달고 삽상하다. 바람에 실려 오는 들꽃 향기는 상큼하고 새들의 지저귐은 경쾌하다. 추억은 발길 따라 곰실곰실 피어오른다. 이른 아침 고향 읍내에서 중학교까지 걸어 다니던 그 길을 오랜만에 호젓하게 걷는다.
달구지가 다니던 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었고, 승객 두 명을 태운 버스가 느릿느릿 지나간다. 옛 풍기고등학교는 경북항공고등학교로 바뀌었다. 교문 앞 전투 비행기는 이륙할 듯 날렵한 자세다. 한울타리에 있던 풍기중학교는 읍내 남쪽으로 옮겨갔다. 조선시대 인재양성 지방교육기관인 풍기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는 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모교인 금계중학교는 초라한 단층 목조건물에서 3층 슬라브건물로 증축됐다. 독립문을 닮은 덩치 큰 ‘석계문’은 낯설고 어색하다. 운동장에 길게 그늘을 드리우던 미루나무는 사라졌다. 죽계천을 경계로 맞은 편은 동양대학이다. 인구 1만 1,000여 명의 읍 소재지에 향교에서부터 대학까지 들어선 마을은 ‘교촌(校村)리’다.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영월 주천(酒泉)리엔 술 공장이 들어섰다. 용인시 기흥(器興)엔 반도체공장이 많다. 울진군 온정(溫井)리에는 백암온천수가 솟는다. 청주비행장 관제탑이 들어선 곳의 옛 지명은 관제(管制)리다. 인근에 비상(飛上)리와 비하(飛下里)리가 있는 걸 보면 땅 이름에 조상들의 예지가 번득인다.
금계중학교가 들어선 마을은 금계리(金鷄)리다. 들머리에 ‘정감록 제일승지 풍기인삼 시배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마을 뒷산에는 닭의 모양을 닮은 ‘금계바위’가 있다.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 격인 ‘정감록(鄭鑑錄)’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라 꼽은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첫 번째 꼽히는 땅이다. 한국전쟁 때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피난민들이 풍기에 집중된 이유다. 30∼40년 전만 해도 60대 이상 인구의 약 70%가 북에서 내려온 이주민이었다.
금계리는 공교롭게도 조선 중종 36년(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처음 인삼을 심은 곳이다. 백성들이 나라에 공물로 바칠 산삼을 캐러 다니는 고통이 너무 크다며 산삼의 씨앗을 받아와 직접 재배에 나섰다고 전해진다. 소백산 자락 고원지대의 내륙성 한랭기후에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로 인삼재배의 적지다. 마을에선 해마다 개삼제를 지내며 전통을 잇는다.
풍기 인삼과 인견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에는 월남인들의 영향이 크다. 개성과 황해도 일원에서 인삼재배 기술을 익힌 데다 다년생 인삼을 재배할 자본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서 족답기를 짊어지고 남하한 직물 기술자들은 나무에서 실을 뽑은 인견사를 원료로 인견 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한때 인견을 짜는 집이 2,000여 호를 넘었고, 지금은 인견 산업단지로 성장했다. 월남인들이 삶터를 일구고 희망을 뿌리내린 힘의 원천은 민간인의 이상향 담론이 담긴 승지(勝地)의 선택과 개척정신이다.
달구지가 다니던 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었고, 승객 두 명을 태운 버스가 느릿느릿 지나간다. 옛 풍기고등학교는 경북항공고등학교로 바뀌었다. 교문 앞 전투 비행기는 이륙할 듯 날렵한 자세다. 한울타리에 있던 풍기중학교는 읍내 남쪽으로 옮겨갔다. 조선시대 인재양성 지방교육기관인 풍기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는 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모교인 금계중학교는 초라한 단층 목조건물에서 3층 슬라브건물로 증축됐다. 독립문을 닮은 덩치 큰 ‘석계문’은 낯설고 어색하다. 운동장에 길게 그늘을 드리우던 미루나무는 사라졌다. 죽계천을 경계로 맞은 편은 동양대학이다. 인구 1만 1,000여 명의 읍 소재지에 향교에서부터 대학까지 들어선 마을은 ‘교촌(校村)리’다.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영월 주천(酒泉)리엔 술 공장이 들어섰다. 용인시 기흥(器興)엔 반도체공장이 많다. 울진군 온정(溫井)리에는 백암온천수가 솟는다. 청주비행장 관제탑이 들어선 곳의 옛 지명은 관제(管制)리다. 인근에 비상(飛上)리와 비하(飛下里)리가 있는 걸 보면 땅 이름에 조상들의 예지가 번득인다.
금계중학교가 들어선 마을은 금계리(金鷄)리다. 들머리에 ‘정감록 제일승지 풍기인삼 시배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마을 뒷산에는 닭의 모양을 닮은 ‘금계바위’가 있다.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 격인 ‘정감록(鄭鑑錄)’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라 꼽은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첫 번째 꼽히는 땅이다. 한국전쟁 때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피난민들이 풍기에 집중된 이유다. 30∼40년 전만 해도 60대 이상 인구의 약 70%가 북에서 내려온 이주민이었다.
금계리는 공교롭게도 조선 중종 36년(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처음 인삼을 심은 곳이다. 백성들이 나라에 공물로 바칠 산삼을 캐러 다니는 고통이 너무 크다며 산삼의 씨앗을 받아와 직접 재배에 나섰다고 전해진다. 소백산 자락 고원지대의 내륙성 한랭기후에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로 인삼재배의 적지다. 마을에선 해마다 개삼제를 지내며 전통을 잇는다.
풍기 인삼과 인견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에는 월남인들의 영향이 크다. 개성과 황해도 일원에서 인삼재배 기술을 익힌 데다 다년생 인삼을 재배할 자본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서 족답기를 짊어지고 남하한 직물 기술자들은 나무에서 실을 뽑은 인견사를 원료로 인견 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한때 인견을 짜는 집이 2,000여 호를 넘었고, 지금은 인견 산업단지로 성장했다. 월남인들이 삶터를 일구고 희망을 뿌리내린 힘의 원천은 민간인의 이상향 담론이 담긴 승지(勝地)의 선택과 개척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