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귀앓이
어느 봄날의 귀앓이
by 김재은 대표 2016.04.14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귀앓이가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앓아왔던 오른쪽 귀에 다시 염증이 생긴 것이다.
병원이라는 곳은 먼 나라였던 어린 시절, 겨우 약국에서 소독약을 사다가 임시처치만을 반복하며 염증을 다스리다가 끝내 고막이 거의 소실되고 말았다.
지각이 긴 세월 속에서 풍화작용을 하여 험준한 장년기지형이 노년기, 준평원에 이르러 평평해지듯 오랜 시간의 귀앓이는 또 다른 풍화작용이 되어 끝내 오른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부모 역할을 못해 그런 것 같다고 마음 아파했지만 어찌 그것이 부모님 탓이랴. 없는 살림에 밥 굶기지 않고 훌륭하게 키워준 것만으로도 이미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거늘. 문득 세상살이가 나의 귀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염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물질(적군)과 내 몸(아군)의 싸움의 결과물 아닌가. 치열하게 싸울 때는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잘 견뎌내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새 살이 돋기도 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시끄러운 길거리나 소란한 술자리 등에서 대화를 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한계가 있다. 그리 애쓰지 말고 내 귀에 들리는 소리만 듣고 살자며 나에게 관대한 제안을 하기도 한다. 뭐 그리 다 들으려 하는가. 그것도 나의 욕심이거니 하며 내 삶에 편안함을 주려 애쓰기도 한다. 대신 반만 들어도 좋으니 마음을 열고 듣자. 눈도 마주치고 맞장구를 쳐가며 듣자. 이것이 나의 듣기, 경청의 자세이다.
앞서 선거 기간에는 온갖 소리들로 세상이 왁자지껄했다. 삶이 요지경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확인해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다들 자신의 소리를 내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정작 듣는 사람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데 소홀하다는 것,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세상이다 보니 갈등은 증폭되고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다.
아마 세상도 귀앓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다툼과 갈등들이 이어져 오다 선거철에 증폭되는 듯 하다. 내 잇속을 챙기려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무엇을 위해 ‘그 자리’를 얻으려 하는지 진심으로 생각해본다면 새로운 귀가 열리지 않았을까.
양극화, 빈부 격차, 실업, 이해관계의 충돌 등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날이 갈수록 세상이 어려워지고 있다. 어느 성인이 이야기한 대로 고해(苦海)이다. 이러니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길 애타게 기다릴까.
나로 돌아온다.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소리를 무시하며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고집, 내 생각에 빠져 잘 듣기는커녕 나의 말로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의 말대로 잔인한 계절 4월이다. 이맘때쯤이면 가슴 아픈 일들이 수없이 떠오른다. 세월호의 아픈 이웃들이 떠오르고 민주주의를 지키다 떠나간 영령들도 저만치에 있다. 아픈 사람들이 참 많은 시절이다. 이웃의 아픔에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리라. 여기 한쪽 귀만으로도 그래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아플 때 내 마음이 아팠고, 바로 그때 귀앓이를 했던 것 같다.
신기하다. 그리고 따뜻하다.
병원이라는 곳은 먼 나라였던 어린 시절, 겨우 약국에서 소독약을 사다가 임시처치만을 반복하며 염증을 다스리다가 끝내 고막이 거의 소실되고 말았다.
지각이 긴 세월 속에서 풍화작용을 하여 험준한 장년기지형이 노년기, 준평원에 이르러 평평해지듯 오랜 시간의 귀앓이는 또 다른 풍화작용이 되어 끝내 오른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부모 역할을 못해 그런 것 같다고 마음 아파했지만 어찌 그것이 부모님 탓이랴. 없는 살림에 밥 굶기지 않고 훌륭하게 키워준 것만으로도 이미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거늘. 문득 세상살이가 나의 귀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염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물질(적군)과 내 몸(아군)의 싸움의 결과물 아닌가. 치열하게 싸울 때는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잘 견뎌내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새 살이 돋기도 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시끄러운 길거리나 소란한 술자리 등에서 대화를 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한계가 있다. 그리 애쓰지 말고 내 귀에 들리는 소리만 듣고 살자며 나에게 관대한 제안을 하기도 한다. 뭐 그리 다 들으려 하는가. 그것도 나의 욕심이거니 하며 내 삶에 편안함을 주려 애쓰기도 한다. 대신 반만 들어도 좋으니 마음을 열고 듣자. 눈도 마주치고 맞장구를 쳐가며 듣자. 이것이 나의 듣기, 경청의 자세이다.
앞서 선거 기간에는 온갖 소리들로 세상이 왁자지껄했다. 삶이 요지경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확인해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다들 자신의 소리를 내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정작 듣는 사람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데 소홀하다는 것,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세상이다 보니 갈등은 증폭되고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다.
아마 세상도 귀앓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다툼과 갈등들이 이어져 오다 선거철에 증폭되는 듯 하다. 내 잇속을 챙기려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무엇을 위해 ‘그 자리’를 얻으려 하는지 진심으로 생각해본다면 새로운 귀가 열리지 않았을까.
양극화, 빈부 격차, 실업, 이해관계의 충돌 등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날이 갈수록 세상이 어려워지고 있다. 어느 성인이 이야기한 대로 고해(苦海)이다. 이러니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길 애타게 기다릴까.
나로 돌아온다.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소리를 무시하며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고집, 내 생각에 빠져 잘 듣기는커녕 나의 말로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의 말대로 잔인한 계절 4월이다. 이맘때쯤이면 가슴 아픈 일들이 수없이 떠오른다. 세월호의 아픈 이웃들이 떠오르고 민주주의를 지키다 떠나간 영령들도 저만치에 있다. 아픈 사람들이 참 많은 시절이다. 이웃의 아픔에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리라. 여기 한쪽 귀만으로도 그래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아플 때 내 마음이 아팠고, 바로 그때 귀앓이를 했던 것 같다.
신기하다. 그리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