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 다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
열 명 다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
by 권영상 작가 2016.04.07
아침에 당혹스러운 기사를 봤다. 자녀를 10명이나 둔 44살의 아버지가 사채에 시달려 도피하느라 7명의 자녀를 초등학교에도 보내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지병으로 일자리마저 구하기 힘들어 부인이 식당에서 일하여 받는 일당 8만 원과 기초생활수급비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단다.
26살 큰딸은 중학교 중퇴 후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자격이나마 취득했지만 24살 둘째 자녀부터 여덟째 자녀까지는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거기다가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는 지난해 과태료 5만 원을 물고 나서야 한꺼번에 출생신고를 했다. 다행히 아홉째와 열째 막내는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딱한 사정을 안 학교를 통해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모양이다.
결코 남의 일 같은 기사에 마음이 잠시 먹먹했다. 40대 중반의 부모가 10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이 밝은 세상에 7명의 자녀가 초등교육의 혜택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출생신고도 못 한 채 네 명의 자녀가 10여 년을 살았다는 점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고만고만한 7명의 자녀를 키워내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한편으론 놀라기도 했지만 그들 방식대로 자식을 많이 낳아 키우며 사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5평 좁은 방에서 7명의 가족이 산다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부럽기보다 애처롭다. 그런 생각은 나만일까.
대개 기사의 댓글은 부정적이거나 대책 없는 비난이 대부분인데 이 기사의 댓글만은 다르다. 따스하다. 인정이 배어있다. 겨울을 견뎌낸 힘이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다. 기사 내용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댓글만큼은 4월 봄처럼 훈훈했다.
“참 어이가 없네.”, “왜 애들을 저렇게 많이 낳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다섯째부터 출생신고 못 할 정도면 그때부터 생활고로 도피 생활했다는 얘긴데 그러면서 다섯을 더 낳았어. 허, 금슬이 좋은 건지…….”
이런 비난성 댓글을 보면서도 그게 꼭 비난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왠지 그 탓하는 말 속에 그들 부부에 대한 애정과 저걸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읽혔다.
그런가 하면 이런 댓글도 있다.
“슬픈 소식인데, 왜 이렇게 웃음이, 웃픈 현실이네.”, “저 부모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욕은 하지 말자, 자기 자식 안 버리고 학대 안 한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도망자 신세라 아이들 출생신고도 못 했구나! 사채업자에 쫓기면 저보다 더한 짓도 하는데 욕하지 맙시다.” 라거나 “10명 다 살아 있음 다행!”이라는 안도하는 반응도 있다.
900여 개의 댓글을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댓글에 스며있는 인정은 모두 같을 것이다. 비난하기보다 힘든 이웃을 위한 관용과 배려, 측은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역시 봄의 힘이란 위대하구나 했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걱정해주는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이 숨 쉬며 산다는 것에 마음 뿌듯했다. 부디 그들 부부의 딱한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26살 큰딸은 중학교 중퇴 후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자격이나마 취득했지만 24살 둘째 자녀부터 여덟째 자녀까지는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거기다가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는 지난해 과태료 5만 원을 물고 나서야 한꺼번에 출생신고를 했다. 다행히 아홉째와 열째 막내는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딱한 사정을 안 학교를 통해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모양이다.
결코 남의 일 같은 기사에 마음이 잠시 먹먹했다. 40대 중반의 부모가 10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이 밝은 세상에 7명의 자녀가 초등교육의 혜택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출생신고도 못 한 채 네 명의 자녀가 10여 년을 살았다는 점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고만고만한 7명의 자녀를 키워내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한편으론 놀라기도 했지만 그들 방식대로 자식을 많이 낳아 키우며 사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5평 좁은 방에서 7명의 가족이 산다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부럽기보다 애처롭다. 그런 생각은 나만일까.
대개 기사의 댓글은 부정적이거나 대책 없는 비난이 대부분인데 이 기사의 댓글만은 다르다. 따스하다. 인정이 배어있다. 겨울을 견뎌낸 힘이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다. 기사 내용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댓글만큼은 4월 봄처럼 훈훈했다.
“참 어이가 없네.”, “왜 애들을 저렇게 많이 낳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다섯째부터 출생신고 못 할 정도면 그때부터 생활고로 도피 생활했다는 얘긴데 그러면서 다섯을 더 낳았어. 허, 금슬이 좋은 건지…….”
이런 비난성 댓글을 보면서도 그게 꼭 비난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왠지 그 탓하는 말 속에 그들 부부에 대한 애정과 저걸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읽혔다.
그런가 하면 이런 댓글도 있다.
“슬픈 소식인데, 왜 이렇게 웃음이, 웃픈 현실이네.”, “저 부모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욕은 하지 말자, 자기 자식 안 버리고 학대 안 한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도망자 신세라 아이들 출생신고도 못 했구나! 사채업자에 쫓기면 저보다 더한 짓도 하는데 욕하지 맙시다.” 라거나 “10명 다 살아 있음 다행!”이라는 안도하는 반응도 있다.
900여 개의 댓글을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댓글에 스며있는 인정은 모두 같을 것이다. 비난하기보다 힘든 이웃을 위한 관용과 배려, 측은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역시 봄의 힘이란 위대하구나 했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걱정해주는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이 숨 쉬며 산다는 것에 마음 뿌듯했다. 부디 그들 부부의 딱한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