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니까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니까
by 김재은 대표 2016.03.16
봄이다.
2016년 새해를 시작하고 나서 작심삼일을 진하게 겪었다. 다시 설날을 맞으면서 ‘이 기회는 놓치지 않아야지’ 하고 나서도 다시 유야무야된 계획을 먼발치에서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러다가 3월이 고대 서양에서는 새해 첫 달이었음을 상기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결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반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바보는 늘 결심만 한다더니 나는 일관되게 바보인가보다.
왜 못했을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떠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못했다(?)라니... ‘못했다’고 생각을 하면서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는 나 자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거기에 문제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후려친다.
단지 안 한 것 뿐인데 못했다고 생각하며 나의 소중한 삶을 그깟 핑계 등에 맡기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삶의 주도성을 잃고 살았구나, 내 민낯이 그대로 거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온 지난 삶이 조금은 서글퍼진다.
못했다고 하면 나와는 관계없는 불가피한 무엇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니 나의 책임은 없다. 나는 떳떳하다, 나는 책임없어 라고 외치는 그 모습 한편엔 앞으로 그 무엇도 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서린 듯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도 있듯이 수많은 ‘탓’들이 저 들판의 우점종의 들풀처럼 우리네 삶을 점령해버렸다. 그러니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네 탓’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온전히 책임을 지려 하는 사람이 없다. 문제는 끝없이 생겨나는데 해결의 주체가 될 책임은 내팽개쳐버리는 것이다.
다시 나로 돌아온다.
여기서 언제부터인가 생겨난 편견이 한몫하고 있음을 본다. 안 했다고 하면 당돌함 내지는 무례함이 느껴져 상대는 ‘괘씸’ 하다며 크게 감정적 반응을 한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유를 들어 ‘못했다’고 하는 것보다 뭔가 다른 게 느껴진다. ‘못한’ 사람들은 다음에도 또 다른 이유를 들어 ‘못했다’고 할 가능성이 크지만 ‘안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도성을 가지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는 ‘할’ 가능성이 훨씬 크지 않을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바로 ‘자기 책임’이다. 하고 안 하고에 대한 결과를 온전하게 자기 책임으로 가져간다는 것이다. 자기 책임 위에서는 ‘하고’와 ‘안 하고’는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그런 자세가 그 사람을 당당하게 힘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하고 안 하고를 나 스스로 결정하고 거기에 걸맞은 책임과 행동을 해 나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이다. 요즘 나이 서른이 되도록 무엇 하나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기 결정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안타까운 현실에서 더욱 권장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책임을 지는 게 두려워 못한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안 한다고’ 선언하라. 하기 싫다고 그래서 안 하겠다고 솔직하게 선언할 때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더 큰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못 하는 것은 없다. 안 할 뿐이다. 그래야 삶의 주인이다.
그런데도 멈칫멈칫하며 이유를 들고 핑계를 대며 어떻게 하면 책임을 회피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동안의 삶의 관성 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나를 챙긴다.
‘못했다’가 아니라 ‘안 했다’ 바로 이것이 새봄에 얻은 큰 수확이다. 가을이 아님에도.
2016년 새해를 시작하고 나서 작심삼일을 진하게 겪었다. 다시 설날을 맞으면서 ‘이 기회는 놓치지 않아야지’ 하고 나서도 다시 유야무야된 계획을 먼발치에서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러다가 3월이 고대 서양에서는 새해 첫 달이었음을 상기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결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반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바보는 늘 결심만 한다더니 나는 일관되게 바보인가보다.
왜 못했을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떠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못했다(?)라니... ‘못했다’고 생각을 하면서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는 나 자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거기에 문제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후려친다.
단지 안 한 것 뿐인데 못했다고 생각하며 나의 소중한 삶을 그깟 핑계 등에 맡기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삶의 주도성을 잃고 살았구나, 내 민낯이 그대로 거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온 지난 삶이 조금은 서글퍼진다.
못했다고 하면 나와는 관계없는 불가피한 무엇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니 나의 책임은 없다. 나는 떳떳하다, 나는 책임없어 라고 외치는 그 모습 한편엔 앞으로 그 무엇도 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서린 듯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도 있듯이 수많은 ‘탓’들이 저 들판의 우점종의 들풀처럼 우리네 삶을 점령해버렸다. 그러니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네 탓’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온전히 책임을 지려 하는 사람이 없다. 문제는 끝없이 생겨나는데 해결의 주체가 될 책임은 내팽개쳐버리는 것이다.
다시 나로 돌아온다.
여기서 언제부터인가 생겨난 편견이 한몫하고 있음을 본다. 안 했다고 하면 당돌함 내지는 무례함이 느껴져 상대는 ‘괘씸’ 하다며 크게 감정적 반응을 한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유를 들어 ‘못했다’고 하는 것보다 뭔가 다른 게 느껴진다. ‘못한’ 사람들은 다음에도 또 다른 이유를 들어 ‘못했다’고 할 가능성이 크지만 ‘안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도성을 가지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는 ‘할’ 가능성이 훨씬 크지 않을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바로 ‘자기 책임’이다. 하고 안 하고에 대한 결과를 온전하게 자기 책임으로 가져간다는 것이다. 자기 책임 위에서는 ‘하고’와 ‘안 하고’는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그런 자세가 그 사람을 당당하게 힘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하고 안 하고를 나 스스로 결정하고 거기에 걸맞은 책임과 행동을 해 나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이다. 요즘 나이 서른이 되도록 무엇 하나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기 결정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안타까운 현실에서 더욱 권장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책임을 지는 게 두려워 못한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안 한다고’ 선언하라. 하기 싫다고 그래서 안 하겠다고 솔직하게 선언할 때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더 큰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못 하는 것은 없다. 안 할 뿐이다. 그래야 삶의 주인이다.
그런데도 멈칫멈칫하며 이유를 들고 핑계를 대며 어떻게 하면 책임을 회피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동안의 삶의 관성 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나를 챙긴다.
‘못했다’가 아니라 ‘안 했다’ 바로 이것이 새봄에 얻은 큰 수확이다. 가을이 아님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