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일몰을 바라보는 그 무렵에

일몰을 바라보는 그 무렵에

by 권영상 작가 2016.03.03

해 질 무렵, 아무도 없는 빈 산에 올랐다. 운 좋게도 빈 산 산등성이에서 일몰을 만났다. 언제 보아도 일몰은 곱다. 눈부신 태양도 일몰의 순간만은 차분하다. 짙붉거나 다홍이거나 주황이거나 꽃빛이거나 해는 제가 가진 빛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조용하고도 황홀한 낙조를 바라보기 위해 팥배나무 아래 나무 벤치에 앉았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눈물 어린 바람 속에
나를 남기고 떠나야 하는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저쪽 어느 산등성이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마흔은 훌쩍 넘겼을 성싶은 여자의 목소리다. 그녀도 지금 나처럼 이 빈 산에서 일몰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노래가 일몰의 반향처럼 아프게 날아왔다. 어쩌면 그녀는 일몰을 바라보며 지금 누군가와 마음 속 이별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그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만 사랑한다고 말해주오.
사랑이여, 안녕히.’
산 너머로 지는 일몰과 노래에 담긴 이별이 적잖이 닮아 있다. 그녀의 노래가 막 끝나갈 즈음 그 아름답던 일몰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하늘에 남겨둔 화려한 만양의 여운뿐. 그리고 내 귀에 아직도 맴도는 그녀 애잔한 목소리의 여운뿐. 한참 앉아있는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그녀가 불렀던 그 마지막 구절 ‘사랑이여, 안녕히!’가 흘러나왔다.
일몰을 바라보며 노래할 줄 아는 그녀가 갑자기 궁금했다. 나를 남기고 떠나가야 하는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해 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나는 나무 벤치에서 일어났다. 일몰이 천천히 잦아들면서 2월의 스산한 저녁 바람이 산등성이를 향해 불어왔다. 마른 아카시나무며 오리나무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으스스하다. 천천히 산길을 밟아 걸어내렸다.
일몰의 아름다움도 오래지 않아 어둠에 묻히고 말듯 사람의 사랑이란 것도 금방 잊혀지고 마는 것, 그리고 인생도 정원의 나무들처럼 그렇게 늙어가는 것.
어두운 길을 조심조심 걸어 내려올 때다.
길 저쪽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두 여자의 어두운 실루엣이 보였다. 속삭이듯 부드러운 노래가 그들 중 누구의 입에서 다시 들려왔다.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
조금 전 산등성이에서 듣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애틋한 노래 때문일까. 나무를 스치던 스산한 바람마저 잦아들고, 산에는 오직 그녀의 그 약간은 애처로운 듯한 노랫소리만 번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이별이 있었을까. 그녀에게 일몰만큼 아름다웠던 사랑이 있었다면 그건 어떤 사랑이었을까.
산 아래 샘물터에 먼저 내려온 나는 괜히 운동기구에 매달려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마지막 갈림길에서 나와는 다른 길로 내려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