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동자도 알기는 쉽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
삼척동자도 알기는 쉽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
by 정운 스님 2016.02.23
걸인도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 되는 줄 아는데, 왜 부자가 되지 못하는 걸까? …… 노력하여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의제기할 문제도 있지만, 여기서는 인과(因果)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우리가 아는 만큼 실천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일반 관례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고 지탄받는 것도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앎과 행동이 일치하기가 어찌 쉬운가?! 겉과 속이 다르거나 앎과 행실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앎과 행의 일치란 쉽지 않다.
당나라 때 재상 백낙천(772~846)은 당송 8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학식과 시문학에 뛰어난 대가였다. 그는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배우고 싶어 많은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백낙천이 항주 자사(刺史)로 있을 때, 마침 그 지역에 매우 유명한 스님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바로 조과도림(741~824)이라는 스님인데, 이 스님은 새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나무 위에서 좌선한다고 하여 ‘조과’라고 불렀다. 백낙천은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님이 살고 있는 사찰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먼저 백낙천이 스님에게 물었다.
“큰 스님 제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가르침을 듣고자 왔습니다. 좋은 말씀 하나 해주십시오.”
“모든 악한 행동하지 말고, 많은 선한 일만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스님, 제가 고작 그런 말씀 듣고자 찾아왔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닙니까?”
“그래, 삼척동자도 알기는 쉬워도,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일세.”
그 유명한 천하의 백낙천이 스님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고 한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불교는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그 진리를 알고 배웠으면, 진리에 맞는 실천이나 수행이 반드시 따라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함께 모신다.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는 것과 실천의 합일은 유학의 한 일파인 양명학에서도 주장한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인데, 참다운 지식은 반드시 그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지(知)’는 단순히 앎이 아니라고 본다. 자아인식이 된 앎, 인격 완성도가 높은 의미의 앎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가 교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종교인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지탄의 목소리가 큰 것이 사실이다. 바로 앎과 행이 같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무너졌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철학적이거나 종교적 이론이 아닌 일반 보통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가 살면서 쉽게 말을 내뱉게 되는데, 말을 하기 전에 신중해야 할 것이요, 아는 만큼 행실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이점이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만큼 실천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일반 관례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고 지탄받는 것도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앎과 행동이 일치하기가 어찌 쉬운가?! 겉과 속이 다르거나 앎과 행실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앎과 행의 일치란 쉽지 않다.
당나라 때 재상 백낙천(772~846)은 당송 8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학식과 시문학에 뛰어난 대가였다. 그는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배우고 싶어 많은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백낙천이 항주 자사(刺史)로 있을 때, 마침 그 지역에 매우 유명한 스님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바로 조과도림(741~824)이라는 스님인데, 이 스님은 새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나무 위에서 좌선한다고 하여 ‘조과’라고 불렀다. 백낙천은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님이 살고 있는 사찰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먼저 백낙천이 스님에게 물었다.
“큰 스님 제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가르침을 듣고자 왔습니다. 좋은 말씀 하나 해주십시오.”
“모든 악한 행동하지 말고, 많은 선한 일만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스님, 제가 고작 그런 말씀 듣고자 찾아왔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닙니까?”
“그래, 삼척동자도 알기는 쉬워도,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일세.”
그 유명한 천하의 백낙천이 스님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고 한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불교는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그 진리를 알고 배웠으면, 진리에 맞는 실천이나 수행이 반드시 따라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함께 모신다.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는 것과 실천의 합일은 유학의 한 일파인 양명학에서도 주장한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인데, 참다운 지식은 반드시 그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지(知)’는 단순히 앎이 아니라고 본다. 자아인식이 된 앎, 인격 완성도가 높은 의미의 앎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가 교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종교인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지탄의 목소리가 큰 것이 사실이다. 바로 앎과 행이 같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무너졌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철학적이거나 종교적 이론이 아닌 일반 보통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가 살면서 쉽게 말을 내뱉게 되는데, 말을 하기 전에 신중해야 할 것이요, 아는 만큼 행실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이점이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