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by 정운 스님 2020.06.02
인간의 삶, 자체가 다툼이 많은 세상이다. 일전에 어느 지인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 의견 충돌 주제는 여성 인권 문제였다. 상대방[男]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견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나 또한 내 의견이 옳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서로 기분 좋을 리는 없다. 내 기분이 언짢으니, 상대방을 좋게 평가할 리가 없다. 그 상대방 또한 기분 언짢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왜 기분이 나쁜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 차茶를 정립한 초의 스님(1786~1866)이 있다. 초의 스님이 당시 고승으로 추앙받던 백파 스님의 저술인 <선문수경> 내용을 비판하였다[이렇게 시작되어 200여 년간 선리 논쟁이 있었다]. 초의 스님이 당시 서예가이면서 정치인 신헌(1810~1884)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백파 스님의 사상이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는데, 선비님은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헌의 답이 걸작이다.
“제 생각에 백파 스님도 그렇지만, 스님도 그릇된 곳이 있습니다.”
신헌의 답변에 초의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학문적인 논쟁이기에) 백파 스님과 나, 모두가 허물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서로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부분이 깨닫는 마음자리입니다.”
초의 스님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잘못이라고 지적되는 그 지점이 깨달음의 근원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승려가 마조(709∼788) 선사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께서 알려주세요.’라고 하자, 마조가 이렇게 답했다.
“네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마음[卽汝所不了心], 그 자리가 곧 부처의 경지이다.”
괴롭다고 번뇌를 일으키는 자리,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다투는 그 자리가 번뇌를 해결할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것이든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든 수학 공식처럼 답은 없다. 그 오류라고 지적되는 그 자리에 답이 있고, 그나마 해결책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점을 잊고, 편견에 빠져있으며, 더 나아가 집착까지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절대 꺾지 않는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지점에 귀착된다. 멀리에서 그리고 높은 위치에서 보면,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의 슬픈 자화상을 본다. 마음속 깊이 진정한 변화가 되지 않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쨌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시비비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통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자.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하지 않는가?! 마음의 깊은 견해도 높이 그리고 넓게 만들자.
우리나라 차茶를 정립한 초의 스님(1786~1866)이 있다. 초의 스님이 당시 고승으로 추앙받던 백파 스님의 저술인 <선문수경> 내용을 비판하였다[이렇게 시작되어 200여 년간 선리 논쟁이 있었다]. 초의 스님이 당시 서예가이면서 정치인 신헌(1810~1884)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백파 스님의 사상이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는데, 선비님은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헌의 답이 걸작이다.
“제 생각에 백파 스님도 그렇지만, 스님도 그릇된 곳이 있습니다.”
신헌의 답변에 초의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학문적인 논쟁이기에) 백파 스님과 나, 모두가 허물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서로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부분이 깨닫는 마음자리입니다.”
초의 스님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잘못이라고 지적되는 그 지점이 깨달음의 근원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승려가 마조(709∼788) 선사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께서 알려주세요.’라고 하자, 마조가 이렇게 답했다.
“네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마음[卽汝所不了心], 그 자리가 곧 부처의 경지이다.”
괴롭다고 번뇌를 일으키는 자리,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다투는 그 자리가 번뇌를 해결할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것이든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든 수학 공식처럼 답은 없다. 그 오류라고 지적되는 그 자리에 답이 있고, 그나마 해결책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점을 잊고, 편견에 빠져있으며, 더 나아가 집착까지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절대 꺾지 않는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지점에 귀착된다. 멀리에서 그리고 높은 위치에서 보면,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의 슬픈 자화상을 본다. 마음속 깊이 진정한 변화가 되지 않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쨌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시비비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통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자.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하지 않는가?! 마음의 깊은 견해도 높이 그리고 넓게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