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건강한 시골개들

건강한 시골개들

by 안양교차로 2020.05.28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사람만 봄인가. 세상 모든 만물들에게 다 봄이다.
오늘 점심 무렵이다. 동네 개들이 마을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시골은 집집마다 개를 키우는 편이라 합세하여 짖어대는 울음 기세가 폭풍 같았다. 건너편 야산 기슭에 출현한 흰 개가 문제였다. 동네 개들을 뒤집어지게 만든 그놈은 수캐다. 그리고 그들의 울음 잔치 배경엔 무르익어가는 봄이 있었다.
흰 개는 마을에서 짖어대는 개들의 속내를 너무도 잘 아는 노련한 놈이다. 저번에도 그랬듯이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건너편 산기슭에 나타나 얼씬댔다. 올 거면 오고 갈 거면 가는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을 애태우느라 산자락을 타고 내려올 듯 말 듯, 제 모습을 슬쩍 드러냈다가는 다시 숲에 몸을 숨기고, 그러며 개들 애간장을 태웠다.
흰 개는 발정 나 있었다. 산 너머 어디다 거처를 두고 동네 개들의 마음을 메어쳤다 엎어쳤다 하러 온다. 그놈은 그런 식으로 마을 개들의 마음을 잔뜩 부풀려놓고는 가버렸다.
그 녀석이 오늘 또다시 점심 무렵에 슬그머니 나타났었다. 요 몇 집 안 되는 집 앞 동네엔 덩치가 큰 외국종 개가 한 마리, 가끔 우리 집에 와 내 신발을 물어가는 털개, 최 목수네 누렁 삽살개 두 마리, 지난겨울에 50대 부부가 이사 온 ‘무조건 집’ 누렁 쌀개가 있다. 당신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를 오후쯤이면 앰플리어로 꽝꽝 틀어대는 무조건집 쌀개도 작지만 짖었다 하면 소름 끼칠 정도로 앙칼지다.
어쨌든 무르익어가는 봄 때문에 시골 개들이 안달 났다.
흰 개는 이번에도 그렇게 마을 개들의 마음을 달 뜨게 해놓고는 산을 넘어 영영 가버렸다. 흰 개가 가고 난 뒤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텃밭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비 내리는 오후, 따끈한 라면 생각에 물을 올려놓을 때다.
“이런 나쁜 놈의 개가!”
당신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집 주인사내 목소리가 덜컹 났다.
뭔 일인가 하고 내다봤다. 그 집 안 마당에서 개 두 마리가 비를 맞으며 흘레붙고 있었다. 마을 개들의 애간장을 태우던 그 흰 개였다. 그놈이 연두색 쇠망으로 둘러친 그 집 울타리를 넘어들어가 묶여있는 앙칼진 개를 건들었다. 빗자루를 들고 개를 을러대는 그 집 사내를 보다가 나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다 끓은 라면을 앞에 놓고 한 젓가락 집는다.
텃밭에 산미나리 씨앗을 뿌려놓고 기다릴 때가 생각난다. 자고 나가보면 누가 씨앗 뿌린 곳 여기저기를 옴푹옴푹 파 놓았다. 고양이 짓이야, 개 짓이야 하며 묻고 돌아서면 다음 날 아침, 또 고만한 구덩이가 옴푹옴푹 나 있었다.
그게 개들의 짓임을 옆집 수원 아저씨를 통해 알았다.
개가 흙 속 굼벵이를 잡아먹느라 그렇게 해놓는다는 거다. 흙 속에 숨어사는 느린 굼벵이의 움직임을 개가 보아내거나 귀로 들어낸다는 거다. 놀랍지 않은가. 개가 땅속을 들여다 보다니!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골목 구석을 보고 개가 짖는 건 거기에 벌레 한 마리쯤 움직이고 있는 걸 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게 개였다. 본능에 충실한 시골 개들. 도시 견공들에게도 그런 본능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주인의 가슴에 안겨 세련된 생활 예절을 배우러 학원을 전전한다는 도시 견공들. 그들에게 시골 개들의 건강한 이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나약해져가는 도시 인류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