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민들레처럼 살다간 누님

민들레처럼 살다간 누님

by 이규섭 시인 2020.04.22

맏 누님이 부활절을 사흘 앞두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부음을 접하고 “고통의 삶을 접으셨군”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집과 병원, 요양원을 오가며 모진 목숨 힘겹게 이어왔다. 병원 가까운 딸네 집 부근에 거처를 두고 긴 투병생활을 했다. 늘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생일상을 몇 해 차렸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같다는” 질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병상의 누님 얼굴을 보고 온 것도 여러 번이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왜소해진 체구에 호스로 미음을 넣으며 “밥을 먹고 싶다”는 것이 누님의 마지막 음성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두 달 동안은 자식들도 요양병원에 들릴 수 없어 풍상의 세월을 신산스럽게 살다 외롭게 떠났다. 병원으로 달려간 막내아들이 “어머니”를 처연하게 부르자 “눈물이 맺힌 것 같다”고 한다.
다음 날 빈소가 차려진 충북 단양을 이른 아침 아들과 남동생과 함께 찾았다. 국화송이에 감싸인 채 분홍 저고리를 입은 영정을 바라보니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육남매의 맏이로 여동생 셋을 둔 뒤 태어난 남동생인 나를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누님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내겐 어머니 같은 존재다. 누님 네 분 중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누님의 지독한 내리사랑은 나와 아들, 손자까지 이어졌다. 병상에서 전화를 받을 때마다 “꼬맹이 잘 있느냐”며 손자의 안부를 꼭 챙겼다.
어렸을 적 누님 집을 방문했다가 심한 감기몸살로 끙끙 알았다. 누님은 한밤 중 십리 가까운 시골길을 걸어 약을 지어왔다. 지극한 정성에 몸살기가 사라졌다. 아득한 세월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헤어질 땐 꼬깃꼬깃 감춰 뒀던 지폐를 주머니에 넣어줬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난 누님은 모진 세월 92년을 온몸으로 해쳐왔다. 그 시대에 태어난 ‘여자의 일생’이 대부분 고단했듯 누님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면장도 직선으로 뽑던 시절 면서기로 근무했던 남편은 면장 출마를 했던 서생이다. 소나기가 내려도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을 거둬드릴 줄 몰랐다. 가족 보다 주변사람을 먼저 챙기던 남편과는 43년 전 사별했다.
박봉에 시달리며 농사는 누님의 몫이다. 올망졸망한 7남매의 끼니를 챙기는 일도 벅차다. 동동걸음치며 들과 집을 오갔다. 그 시절 장남은 4H활동에 전념하며 독창적 과제물로 경진대회를 휩쓸었다. 힘든 어머니에겐 위안이자 자랑거리다. 그런 장남이 어느새 칠순에 접어들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면사무소에서 정년퇴임 했다. 직선제 농협회장이 됐고, 은퇴한 뒤 시니어 가수가 되어 지역행사를 누비며 즐거움을 선사한다. 장례식장 전광판엔 칠남매와 며느리 사위, 손자와 손녀 14명의 이름이 빼곡하다. 자식농사는 잘 지었다. 사경을 넘나들면서도 손자손녀의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누님은 생명력과 번식력이 강한 민들레를 닮았다. 민들레는 들판은 물론 도심의 갈라진 아스팔트 틈새서도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운다. 민들레 홀씨 되어 영토를 넓혀간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민초다. 권사인 누님은 부활절 날 매장으로 남편 곁에 묻혔다. 고통도 슬픔도, 바이러스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