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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가족의 본보기 융합 가족

분열 가족의 본보기 융합 가족

by 이규섭 시인 2020.01.31

재미 한국인 과학자 가족의 집념으로 일본 731부대의 만행이 미국 ‘연구 윤리 교재’에 실렸다는 조선일보의 최근 단독 보도가 섬뜩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731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관동군이 중국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악명 높은 세균전 부대다. 하얼빈시 남쪽 교외 핑팡(平房)지구에 위치해 있는 731부대를 방문한 것은 14년 전. 우리나라 폐교 비슷한 2층 건물로 공식 명칭은 ‘침화일군 731부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찾은 한적한 연병장엔 일본의 만행을 지켜봤을 노목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스산하다.
전시관엔 수천 점의 관련 자료와 일본군이 자행했던 주요 생체 실험 과정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억울하게 죽어간 마루타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리는 듯하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사진과 실험에 쓰였던 도구, 모형을 이용한 생체 실험 장면, 비디오 영상물 등 옌벤족 여성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유리 상자 속에 사람을 가두고 밖에서 공기를 빼내 완전 진공상태를 만든 뒤, 인간의 생존시간을 체크했다. 페스트균 등 각종 세균을 몸속에 주입, 인간의 장기가 어떻게 변하고 투입량에 따라 어느 정도 빨리 죽는지 실험했다. 생체 실험에 사용했던 마루타들 시신은 태워버리거나 구덩이에 파묻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혹 행위다.
조박(45) 미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연구 윤리 강의를 듣다가 유대인 생체 실험 기록은 있는데 731부대 만행이 누락된 것은 불공정하다고 판단했다. NIH 연보 작성자를 찾아내 ‘731부대 만행을 연보에 실어 달라’는 이메일을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 뒤 조 교수는 어머니 박인애(71)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형 조인(46) 펜실베이니아대 의사, 동생 조윤(40) 하버드 의대 교수와 함께 731부대 자료 수집에 나섰다.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일본 정부나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 정치인과 과학자에게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까 우려해 가족끼리 담당하기로 했다는 것. 731부대 생체 실험 피해자의 증언 기록과 사진 등 자료를 모아 첨부했다.
2014년 10월부터 지난해 연말까지 5년 동안 매주 연보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 수정을 요구했다. 수시로 전화도 걸었다. 마침내 새해 첫날부터 미국 국립보건원(NIH) 홈페이지 ‘연구 윤리 연보’에 게재되는 결실을 맺었다. 새 윤리 연보는 ‘1932∼1945년 편에 중국인과 몽골인, 만주인 러시아인들과 함께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이천천 등 한국인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이 됐다’고 적었다.
NIH는 미국 최대 연구비 지원 기관으로 지난해 과학자 30여만 명에게 연구비 392억 달러를 지원했다. 연보는 NIH 연구비를 받는 과학자가 매년 1∼3회 수강해야 하는 윤리 교재다. 불공정을 바로 잡은 재미 과학자 가족의 끈질긴 집념과 융합의 결실이 돋보인 낭보다. 명절이 끝나면 갈등과 가정 파탄이 불거지는 이 땅의 분열 가족의 본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