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죽을 각오로 산다면

죽을 각오로 산다면

by 이규섭 시인 2019.12.06

낙엽이 진다. 빈 가지를 드러낸 나목이 검버섯 핀 노인의 피부 같아 안쓰럽다. 빈 가지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가 송곳처럼 날카로워진다. 한 장 남은 달력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한 해의 무게를 털어낸 외로움이 외롭게 걸렸다.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무는구나 생각하니 인생이 무상하다. 세상도 기운 운동장처럼 위태롭고 어수선하다.
늙은이의 값싼 넋두리만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저물면 누구나 한 번쯤 감상에 젖거나 회한에 빠진다. 평소 우울증 증세가 있으면 더 울적해지기 쉬운 환절기다. 계절이 바뀔 때 우울증이 심하면 계절성 우울증, 또는 계절성 정동장애(情動障碍)현상이라고 한다. 특히 가을과 겨울 사이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불안과 불면, 짜증과 무기력 증상이 나타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은 사람은 2014년 58만 8155명에서 지난해 75만 1930명으로 28% 늘었다. 특히 20대 증가율이 두드러졌다. 같은 기간 20대 우울증 환자는 4만 9975명에서 9만 8434명으로 97%로 껑충 뛰었다. 이 같은 추세라면 올해 20대 우울증 환자는 12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한다. 심각한 청년실업과 이성 문제 고민, 부모와의 갈등으로 마음의 병이 생긴 청년층이 급증한 탓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가적 대책과 범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우울증은 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무서운 병이다. 최근 잇따른 아이돌의 극단적 선택도 악플에 시달린 우울증 영향이 크다. 우울증에 대한 예방과 치료가 부족한 것도 자살의 원인이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악이다. 2016년 기준으로 14년째다. 재작년 반짝 2위로 내려 간 적은 있다. 자살률이 우리보다 높은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하면서다. 작년에 리투아니아를 제치고 다시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되찾은 국가가 됐으니 부끄럽다.
정부는 지난해 1월 2022년까지 자살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국민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26.6명으로 2017년(24.3명)보다 오히려 늘어났다. OECD 평균 11.5명의 두 배 넘는다. 2013년 이후 5년간 줄어들던 자살 사망자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작년에만 1만 367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루 평균 37.5명꼴로 38분마다 1명씩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가 구조된 사람도 지난해 3만 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 52%인 1만 7000여 명만 사후관리가 이뤄졌고 나머지는 응급실에서 퇴원한 뒤 후속관리가 안 됐다는 게 국감자료에서 드러났다. 한차례 자살을 시도한 사람일수록 다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큰데도 지난해 기준 402개 응급실 중 52개 응급실에서만 사후관리가 이뤄졌다. 올해 62개로 늘었다지만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이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잘 받도록 유도하고 사후관리만 잘해도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생명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고 죽을 각오로 산다면 문제 해결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