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서 배우는 일
거미줄에서 배우는 일
by 권영상 작가 2019.09.26
일 주일 만에 안성에 내려왔다. 파밭골 여기저기 풀이 났다. 괭이를 꺼내려 쟁기 창고에 가려는데 뭔가가 내 얼굴을 휘감는다. 거미줄이다. 일주일 집을 비웠더니 어찌 알고 그 사이 거미줄을 쳐놓았다. 거미줄을 걷으려다 한 발 물러섰다. 파란 허공에 지어놓은 거미줄이 멋지다. 책에서 가끔 보던 그 방사형의 넓고 번듯한 집이다.
이쪽 줄은 처마 끝과 창고로 들어가는 문틀에 묶여있고, 저쪽 줄은 이쪽에서 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밭머리 단풍나무 우듬지와 아래쪽 가지에 묶여있다. 그러니까 거미줄은 우리집 과 저쪽 단풍나무 사이의 넓은 공간에 쳐져있다. 집을 지키는 거미가 거미집 한가운데서 엉덩이를 들어올린 채 웅그리고 있다. 좀 전 거미줄에 걸린 내 얼굴 때문에 놀란 모양이다. 그 댁 주인은 낯에 익은 호랑거미다.
거미도 지금 놀라고 있겠지만 나도 지금 놀라고 있는 중이다. 흔한 게 거미줄이지만 이렇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지어진 거미줄을 감탄할 정도로 지켜보는 일은 정말 처음이다. 내가 더욱 감탄하는 것은 집터를 볼 줄 아는 거미의 안목이다.
날벌레들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함정이겠지만 거미 입장에서 보면 여기가 명당이다. 거미가 잡은 집터는 바람이 걸림없이 오고가는 유일한 통로다. 이쪽은 집이고 저쪽은 단풍나무 소나무 편백이 둘러쳐진 울타리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바람이 지나다니는 열려 있는 길이며, 동시에 날벌레들이 건너다니는 유일한 길이다.
거기다가 거미의 명당을 보는 또 하나의 안목이 있다. 뒷집 처마에 켜지는 외등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외등은 밤마다 켜진다. 그러니 날벌레들이 이쪽에서 그쪽으로 당연히 모여들 테고 모여들려면 이 병목길을 통과해야 한다. 거미는 이런저런 상황을 통찰한 뒤 여기에 집을 지었다. 과연 여기가 명당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더욱 놀라는 건 그런 결정적인 공간을 보는 거미의 조감 능력이다. 날개가 있다면 날아올라 주변 지형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테고, 성큼성큼 걸을 수 있다면 여기저기 걸어나가 멀찍이서 지형을 한눈에 보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미가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기어다니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집자리를 보는 탁월한 안목과 비상한 조감능력을 지니고 있는 게 거미다.
그러나 거미들이라고 다 그런 안목과 조감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빗자루를 세워들고 집처마 밑을 돈다. 벽과 처마 사이의 좁디좁은 공간에 조악한 집을 지어놓은 집거미들이 많다. 밉긴 하지만 꽃과 꽃들 사이에 손바닥만도 못 한 거미줄을 쳐놓고 일없이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도 있다. 빈약한 실력으로 처마 밑만 어지럽히거나, 속내를 너무 빤히 드러낸 꽃들 사이에 쳐놓은 잔 거미들의 안목은 같은 거미줄인데도 호랑거미에 비해 간교하다.
잠깐이나마 거미줄을 보며 배운 게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세상을 조망하고 판단하는 안목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 중엔 남보다 앞서서 큰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많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마치 그 상황을 다 아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그때마다 쉬운 대로 그들의 판단에 의지해 그들의 논리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는 나를 가끔 본다. 습관이 되어 그런 나의 미욱한 짓에 불쾌함도 못 느낀다. 그들의 안목도 집거미들처럼 조악하거나 사적인 이유로 간교할 수 있다는 걸 오늘 배운다.
일없이 세상 일에 깊이 관심을 갖기보다 내 진실한 삶을 위해 묵묵히 살고 싶다. 호랑거미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이쪽 줄은 처마 끝과 창고로 들어가는 문틀에 묶여있고, 저쪽 줄은 이쪽에서 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밭머리 단풍나무 우듬지와 아래쪽 가지에 묶여있다. 그러니까 거미줄은 우리집 과 저쪽 단풍나무 사이의 넓은 공간에 쳐져있다. 집을 지키는 거미가 거미집 한가운데서 엉덩이를 들어올린 채 웅그리고 있다. 좀 전 거미줄에 걸린 내 얼굴 때문에 놀란 모양이다. 그 댁 주인은 낯에 익은 호랑거미다.
거미도 지금 놀라고 있겠지만 나도 지금 놀라고 있는 중이다. 흔한 게 거미줄이지만 이렇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지어진 거미줄을 감탄할 정도로 지켜보는 일은 정말 처음이다. 내가 더욱 감탄하는 것은 집터를 볼 줄 아는 거미의 안목이다.
날벌레들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함정이겠지만 거미 입장에서 보면 여기가 명당이다. 거미가 잡은 집터는 바람이 걸림없이 오고가는 유일한 통로다. 이쪽은 집이고 저쪽은 단풍나무 소나무 편백이 둘러쳐진 울타리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바람이 지나다니는 열려 있는 길이며, 동시에 날벌레들이 건너다니는 유일한 길이다.
거기다가 거미의 명당을 보는 또 하나의 안목이 있다. 뒷집 처마에 켜지는 외등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외등은 밤마다 켜진다. 그러니 날벌레들이 이쪽에서 그쪽으로 당연히 모여들 테고 모여들려면 이 병목길을 통과해야 한다. 거미는 이런저런 상황을 통찰한 뒤 여기에 집을 지었다. 과연 여기가 명당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더욱 놀라는 건 그런 결정적인 공간을 보는 거미의 조감 능력이다. 날개가 있다면 날아올라 주변 지형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테고, 성큼성큼 걸을 수 있다면 여기저기 걸어나가 멀찍이서 지형을 한눈에 보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미가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기어다니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집자리를 보는 탁월한 안목과 비상한 조감능력을 지니고 있는 게 거미다.
그러나 거미들이라고 다 그런 안목과 조감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빗자루를 세워들고 집처마 밑을 돈다. 벽과 처마 사이의 좁디좁은 공간에 조악한 집을 지어놓은 집거미들이 많다. 밉긴 하지만 꽃과 꽃들 사이에 손바닥만도 못 한 거미줄을 쳐놓고 일없이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도 있다. 빈약한 실력으로 처마 밑만 어지럽히거나, 속내를 너무 빤히 드러낸 꽃들 사이에 쳐놓은 잔 거미들의 안목은 같은 거미줄인데도 호랑거미에 비해 간교하다.
잠깐이나마 거미줄을 보며 배운 게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세상을 조망하고 판단하는 안목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 중엔 남보다 앞서서 큰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많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마치 그 상황을 다 아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그때마다 쉬운 대로 그들의 판단에 의지해 그들의 논리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는 나를 가끔 본다. 습관이 되어 그런 나의 미욱한 짓에 불쾌함도 못 느낀다. 그들의 안목도 집거미들처럼 조악하거나 사적인 이유로 간교할 수 있다는 걸 오늘 배운다.
일없이 세상 일에 깊이 관심을 갖기보다 내 진실한 삶을 위해 묵묵히 살고 싶다. 호랑거미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