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터 낙서
샘물터 낙서
by 권영상 작가 2019.08.22
산 입새에 샘터가 있다. 한때는 샘이었지만 지금은 관정을 박은 지하수다. 물이 흔해지자 물 받으러 오는 이들이 많아졌고, 자연히 샘터 주변도 포장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손을 씻으러 샘터에 들렀다. 거기 시멘트 길바닥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식량을 버리고 배를 가라앉히다.’
글귀는 또박또박 쓴 분필 글씨다. 그 곁에 捨量沈舟(사량침주)라는 한자까지도 쓰여있다. 길바닥에 써놓은 글씨지만 어눌하거나 그렇다고 잘난 체 하는 글씨 본새는 아니었다. 나는 한참 서서 눈에 익은 글귀를 내려다보았다. 글귀의 뜻은 이렇다. 살아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운다는 말이다.
진시황 사후 폭압이 심해진 진나라를 치기 위해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넌다. 강을 다 건너자 군사들에게 타고 온 배를 불 지르게 하고, 식량도 삼일치만 남기고 모두 물속에 던져 넣게 한다. 절박한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항우는 진나라와 결사적으로 싸워 이긴다. 사량침주라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태어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샘터 길바닥에 그런 글귀를 쓴 이는 누굴까 그 생각을 했다. 또 그는 그 글귀를 거기에 왜 써놓았는지……. 생각이 그쯤에 이르자 샘터 길바닥에서 가끔 보던 낙서 아닌 낙서 같은 분필글씨 기억이 났다.
그가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읽고 있는 분 같았다. 단순히 지식을 과시하는 허튼 낙서 같지는 않았다. 그는 고단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절망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불안한 오늘을 걱정하는 분 같았다. 절망의 늪으로 내몰렸을 때 목숨을 버리려 하기보다 절박한 현실과 결사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조언이 아닐까. 어쩐지 길에서 만난 그 글귀가 답답한 우리 현실에 대한 고백과 기록처럼 내게 읽혔다.
그 후, 또 어느 날인가. 폭염에 지쳐갈 때다.
그날도 땀으로 범벅 된 얼굴을 씻으려고 샘터에 들어섰다. 이번에도 흰 분필 글씨로 쓰여진 길바닥 낙서를 다시 만났다.
견병수동 지천하지한 - 병속에 담긴 물이 어는 걸 보면 겨울이 온 걸 알 수 있다.
손을 씻고 돌아 나오며 다시 그 글 앞에 섰다. 그때 내 발 아래로 팥배나무 노란 낙엽 한 장이 몸을 흔들며 떨어졌다. 낙엽을 주워들고 보니 머잖아 다가올 서늘한 가을이 이 산 어디쯤에 와 있는 듯했다. 폭염도 잠시다. 더위가 맹렬할수록 남아있는 여름은 점점 작아지는 법, 나는 그 글귀에서 염천을 통해 가을을 보라는 뜻으로 읽었다.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 폭염과의 허전한 작별을 생각하려니 폭염도 그리 밉지 않다.
근데 나는 오늘 우연히 이 길바닥 낙서 주인공을 만났다. 대충 얼굴이 익은 분이었다. 늘 이 샘터에 물을 뜨러 오는 분이다. 물 뜨고 주변 운동기구가 있는 공터를 비질하고, 또 거기에서 운동도 하던, 무릎이 툭 불거져 나온 바지에 키가 자그마한 분이었다. 노인이라면 노인이고 아니라면 아닌. 노인의 손에서 정말 그런 글귀가 나왔을까 의심도 들었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인생은 참고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며 사는 것’
흰 백묵으로 이 글귀를 다 쓴 그분이 빗자루를 들고 일어섰다. 그분은 참기만 하며 사시는 분이 아니라 닥친 현실을 극복해내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가벼이 목례를 했다.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분이지만 몸은 꼿꼿했다.
‘식량을 버리고 배를 가라앉히다.’
글귀는 또박또박 쓴 분필 글씨다. 그 곁에 捨量沈舟(사량침주)라는 한자까지도 쓰여있다. 길바닥에 써놓은 글씨지만 어눌하거나 그렇다고 잘난 체 하는 글씨 본새는 아니었다. 나는 한참 서서 눈에 익은 글귀를 내려다보았다. 글귀의 뜻은 이렇다. 살아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운다는 말이다.
진시황 사후 폭압이 심해진 진나라를 치기 위해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넌다. 강을 다 건너자 군사들에게 타고 온 배를 불 지르게 하고, 식량도 삼일치만 남기고 모두 물속에 던져 넣게 한다. 절박한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항우는 진나라와 결사적으로 싸워 이긴다. 사량침주라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태어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샘터 길바닥에 그런 글귀를 쓴 이는 누굴까 그 생각을 했다. 또 그는 그 글귀를 거기에 왜 써놓았는지……. 생각이 그쯤에 이르자 샘터 길바닥에서 가끔 보던 낙서 아닌 낙서 같은 분필글씨 기억이 났다.
그가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읽고 있는 분 같았다. 단순히 지식을 과시하는 허튼 낙서 같지는 않았다. 그는 고단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절망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불안한 오늘을 걱정하는 분 같았다. 절망의 늪으로 내몰렸을 때 목숨을 버리려 하기보다 절박한 현실과 결사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조언이 아닐까. 어쩐지 길에서 만난 그 글귀가 답답한 우리 현실에 대한 고백과 기록처럼 내게 읽혔다.
그 후, 또 어느 날인가. 폭염에 지쳐갈 때다.
그날도 땀으로 범벅 된 얼굴을 씻으려고 샘터에 들어섰다. 이번에도 흰 분필 글씨로 쓰여진 길바닥 낙서를 다시 만났다.
견병수동 지천하지한 - 병속에 담긴 물이 어는 걸 보면 겨울이 온 걸 알 수 있다.
손을 씻고 돌아 나오며 다시 그 글 앞에 섰다. 그때 내 발 아래로 팥배나무 노란 낙엽 한 장이 몸을 흔들며 떨어졌다. 낙엽을 주워들고 보니 머잖아 다가올 서늘한 가을이 이 산 어디쯤에 와 있는 듯했다. 폭염도 잠시다. 더위가 맹렬할수록 남아있는 여름은 점점 작아지는 법, 나는 그 글귀에서 염천을 통해 가을을 보라는 뜻으로 읽었다.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 폭염과의 허전한 작별을 생각하려니 폭염도 그리 밉지 않다.
근데 나는 오늘 우연히 이 길바닥 낙서 주인공을 만났다. 대충 얼굴이 익은 분이었다. 늘 이 샘터에 물을 뜨러 오는 분이다. 물 뜨고 주변 운동기구가 있는 공터를 비질하고, 또 거기에서 운동도 하던, 무릎이 툭 불거져 나온 바지에 키가 자그마한 분이었다. 노인이라면 노인이고 아니라면 아닌. 노인의 손에서 정말 그런 글귀가 나왔을까 의심도 들었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인생은 참고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며 사는 것’
흰 백묵으로 이 글귀를 다 쓴 그분이 빗자루를 들고 일어섰다. 그분은 참기만 하며 사시는 분이 아니라 닥친 현실을 극복해내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가벼이 목례를 했다.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분이지만 몸은 꼿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