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사람에 대한 흠모와 존경심

사람에 대한 흠모와 존경심

by 권영상 작가 2019.04.11

세에타아아악-
토요일 오전 여덟 시, 그분은 우리들의 잠결을 밟고 온다. 아래층에서 계단을 한 칸 한 칸 걸어 오르며 조용히 외치는 그분의 목소리는 천상의 길을 안내하는 듯 성스럽다. 그 소리는 마치 반향이 큰 동굴을 지나는 강물 소리 같고, 다리 아래에서 천진하게 부르는 아이들 노래 같이 은은히 사위를 울린다. 그분의 목소리는 그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는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가 아득한 높이로 사라진다.
세탁물을 받으러 다니는 그분의 목소리는 화들짝 잠을 깨우는 휴대폰 수신음과 다르고, 귓속을 파고드는 초인종 소리와 또 다르다. 그 소리는 신성한 음악이거나 복음과 같다.
금요일 밤, 늦게 잠자리에 든 우리에게 토요일 오전 8시는 한밤중이다. 그분은 그런 우리들의 잠을 다독여주면서 한녘 재재바른 이들을 조심히 깨워 세탁물을 받아간다. 토요일 아침잠이 많은 아내는 한번도 그 목소리에 일어나 세탁물을 맡긴 적이 없다. 대체로 손수 세탁물을 들고 내려가 아파트 앞 그분의 가게에 맡긴다. 간혹 그 세탁물을 내가 찾으러 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만나는 분은 재봉을 하거나 옷을 다리는 여자분이다.
“어서 오세요. 몇 동 몇 호지요?”
실밥을 입에 문 채, 또는 다림질하던 손을 잠깐 놓은 채 여자분은 내게 묻는다. 내가 우리집 호수를 대면 그분은 어김없이 일일이 비닐 커버를 한 옷을 건네준다. 세탁소를 나올 때마다 아쉬운게 있다. 세탁물을 받으러 다니는 그 댁 남자 주인이다. 토요일 아침 복도를 은은히 울리며 오르내리는 그 남자 주인을 가까이서 만나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끔 그분이 한 아름이나 되는 세탁물을 받아안고 계단을 찬찬히 걸어내려오는 걸 보지만 그분의 얼굴은 늘 세탁물에 가려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길을 내주느라 그분의 얼굴을 보겠다는 마음을 놓친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얼굴을 모르고 사는 게 어쩌면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신성한 목소리를 가진 그분을 뵙고 내 마음이 변하느니 목소리만으로 그분 전체를 내 안에 소중히 받아들이는 일이 좋은 게 아닐까.
사람에 대한 신비함이 그리워지는 때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지니고 있는 신비함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속속들이 알아야 속 시원한 게 우리들이다. 일명 알 권리. 세탁소 ‘그 분’이면 될 걸 가지고 그는 어디에 살며, 어떤 차를 몰고, 젊은 시절은 어떻게 보냈고, 부모의 빚은 갚았는지 않았는지. 그것도 부족해 그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엿듣고, 끝내는 그 사람을 탈탈 털어 결점까지 캐고 비난하고…. 그분을 알아야겠다면서 끝내는 나락으로 날려버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 알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섬’마저 잃고, 사람에 대한 사랑과 흠모와 존경심도 잃고 산다. 남은 것이 있다면 사람을 배척하는 기술이다.
세탁소 남자 주인의 얼굴을 또렷이 모르고 사는 일은 어쩌면 그를 흠모할 수 있는 행운일지도 모른다. 토요일 아침, 계단을 울리며 나타나는 그분의 목소리는 지난 한 주간의 나의 죄업을 씻어주는 듯 성스럽다. 그래서 그런 날은 다시 태어나는 듯 행복하다.
“여보, 저 소리 좀 들어봐.”
놀랄까봐 귓속말로 가만히 말하면 잠에 젖은 목소리로 아내가 대답한다.
“듣고 있어. 내 마음이 지금 비온 뒤의 하늘 같애.”
신비함을 느끼는 건 아내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