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묻어둘 건 묻어두고 가자

묻어둘 건 묻어두고 가자

by 권영상 작가 2018.12.27

동네산에 오르다 보면 가끔 어리디어린 잣나무들을 만난다. 10센티도 채 안 되는 갓 태어난 치묘들이다. 잣잎은 솔잎과 달리 녹회색이다. 갓난아기 같이 촉촉한 녹회색 어린 잣잎 치묘는 귀엽다. 비탈길에서 그를 만나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감싸준다. 오, 귀여운 것! 하고.
근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여기에 웬 잣나무 치묘라니! 여긴 팥배나무와 오리나무가 사는 산비탈이다. 잣나무 숲이라면 내가 걸어 올라온 산 아랫자락에 있다. 50미터쯤 아래. 거기서 잣씨앗이 위쪽으로 날아올라올 리 없다. 그러나 좀만 생각해 보고 나면 웃을 수 있다.
잣나무 숲에 늘 와 사는 청설모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먹고 남은 잣씨앗을 물어다 이쯤 오리나무 산비탈에 묻어둔 게 틀림없다. 청설모의 기억에 의해 잡혀갔거나, 땅속 기온에 의해 부패했거나, 오래 잠들어 버렸거나, 아니면 그들 중에서도 천행으로 살아난 잣나무가 그들일 테다. 사실이야 어떻든 청설모가 묻어둔 덕분에 살아난 치묘들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뭔가 묻으며 살아갈 것들이 있다.
묻으며 사는 게 좋은 건가. 밝힐 건 밝히며 사는 게 좋겠지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두부모 자르듯 딱 잘라내고 살 수 있는 게 있는가. 친구 관계에서 만들어진 가슴에 멍울진 상처가 그렇다. 대문 밖을 나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웃과의 서먹한 관계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의 보이지 않는 불편한 관계 역시 그렇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 멍울진 상처며, 서먹한 관계는 마음에 묻으며 살 수 밖에 없다. 사람 살지 않는 사막이나 무인도로 짐을 싸들고 떠나지 않는 이상 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때에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시리고 먹먹할까.
쉰에 아내를 잃은 친구와 가끔 만나 술을 마시면 가는 곳이 있다. 조용한 골목길 노래연습실이다. 그가 그곳에서 가끔 부르는 노래가 있다.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는 자국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진달래 피던 길에 첫사랑 불태웠고, 지난여름 그 사랑에 궂은비 내렸다오.
그는 그 가사의 노래를 좋아한다. 몇 곡의 노래를 더 부르고 노래연습실을 나와 악수를 하며 헤어질 때 그는 푸념처럼 말하곤 한다. ‘노래에다 세월을 묻으며 사는 거지 뭐.’ 그 목 메이는 듯한 말을 들을 때면 코끝이 시큰해진다. 지나간 아픈 사랑을 그는 이 노래에 묻으며 살아왔던 거다. 그 무엇을 가슴에 묻고 사는 일이란 아픈 거지만 그러지 않고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세모가 가까워오는 이맘쯤 그는 또 어느 노래연습실을 찾아 마음의 무거운 짐을 묻으며 이슥한 밤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2018년도 다 가고 있다.
이제 며칠 뒤면 또 새해다. 새해가 새롭기를 바라면서도 살면서 만들어진 아프고 무거운 짐을 쉽게 벗어던지지 못한다. 마음 한편을 꽉 막고 있는, 그대로 안고 가기엔 힘에 부쳐 버거운 것들. 그들을 그대로 안고 간다면 새해는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다.
버리자는 게 아니다. 묻고 갈 것은 묻고 가자는 거다. 묻기로 결심한다면 분명 잃을 것이 있다. 잃는다고 반드시 잃는 것인가. 청설모가 자신이 묻어둔 씨앗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청설모는 더 크고 넓은 잣나무 숲을 가질 수 없다. 묻는 게 버리는 것과 다른 이유가 그것이다. 묻어두는 이상 그것은 언젠가 푸르고 새로운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난다. 묻을 건 묻어두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