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리본 세대’ 촉을 깨우다

‘리본 세대’ 촉을 깨우다

by 이규섭 시인 2018.07.13

‘3번아 잘 있어라 6번은 간다.’ 세태를 풍자한 오래된 유머다. 며느리가 사용하는 비밀코드에 1번은 손녀, 2번은 며느리, 3번은 아들, 4번은 강아지, 5번은 가정부, 6번이 시아버지다.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강아지 보다 못한 존재다. 아들 집에 며칠 머물며 외출한 뒤 돌아오니 현관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삼키며 ‘6번은 간다’고 아들에게 전화로 알린 뒤 낙향한다.
썰렁하고 짠한 유머가 떠오른 건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여론조사를 보고서다. 전국 50∼64세 성인남녀 107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1번은 나 자신(53.9%), 2번은 배우자(40.3%), 3번은 자녀(33.4%), 4번은 부모 형제(28.3%), 5번은 반려동물(15.2%), 6번이 며느리와 사위(5.2%)로 나타났다. 자식과 배우자 보다 ‘나’를 1순위로 선택했다는 게 두드러진 현상이다. 센터는 5060세대를 ‘다시 태어나는’ ‘리본(Re-born) 세대’로 규정했다. 연구를 진행한 김난도 교수는 중년 세대를 흔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낀 세대’로 보는데 오히려 ‘나’를 찾아가는 ‘깬 세대’로 봐야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알뜰살뜰 챙기던 사위와 입에 발린 말이라도 딸 같이 여긴다는 며느리가 꼴찌로 밀려났다. 한때 아파트 이름을 복잡하게 지은 것은 시골에 사는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우스개가 있었다. 시어머니가 길 안내할 시누이를 동반하고 찾아오자 다시 쉽게 지었다는 후속 편이 나왔다.
고부관계는 가깝고도 먼 사이다. 이번 조사에서 시어머니는 자녀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며느리에게 ‘시월드’의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자식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기 싫어 초대받기 전에는 아들 부부 집에 찾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10명 중 3명 가까이는 거의 가지 않는다고 응답하여 시대의 변화를 실감한다.
예전엔 이혼을 고민하는 친구가 상담을 해오면 “인생이 별건가 참고 살아라”고 조언했다. 이제는 ‘서로 간섭하지 말고 각자 생활을 즐기라’는 응답이 33%로 가장 많았다. 졸혼(卒婚)과 이혼을 권한 대답이 각각 20.9%다. ‘참고 살라’는 응답은 4명 중 1명에 그쳤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라던 백년해로(百年偕老)가 100세 시대에 무참하게 무너졌다.
‘리본 세대’는 회사와 가정에 얽매여 살았던 ‘인생 1막’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위해 ‘인생 2막’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55세 이하 응답자 10명 중 7명은 재취업이나 창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도전하고 싶은 자격증은 조리사, 외국어, 공인중개사 순이다.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로는 ‘휴양지에서 한 달 살아 보기’(58.5%), ‘세계 일주’(52.6%), ‘사회에 의미 있는 일 하기’(47.4%) 등이 꼽혔다. 은퇴 세대들도 보육교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거나 맛 집 순례, 노래 교실 등 취미 활동으로 자신을 위한 투자에 적극 나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지수는 높아지게 마련이다. 내면에 잠자던 의식의 촉(觸)을 깨워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