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잃어버린 마음

잃어버린 마음

by 권영상 작가 2018.06.28

아침이면 동네 산에 오르지요. 운동도 할 겸 덜 깬 잠도 깨울 겸 한 시간 정도 산행을 하고 돌아오는 게 일과가 됐습니다. 오늘은 저녁 무렵, 또 한 번 산에 올랐습니다. 동네 산이어도 관악산의 말산이라 산세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숲만한 휴식처가 또 따로 없을 듯합니다. 나는 산 중턱까지 올라 팥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습니다. 모자를 벗어놓고 지는 노을을 무연히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나를 괴롭혀 온 것이 있었습니다.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입니다. 어느 날 우연찮게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땅이 나타났습니다. 이 유산을 둘러싸고 남들 다 부럽다고 할 만큼 화목했던 우리 가정에 금이 가버렸습니다. 유산 앞에서 약해지는 우리를 보며 화목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물건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당신께서 이러라고 그 땅을 불현 주신 건 아니실 텐데 생각이 부족한 우리들은 그걸 두고 지난 1년간 이러네 저러네 말도 많았습니다. 정도만 좀 다를 뿐이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던 상속 분쟁을 우리가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유산 앞에서 미묘하게 변해가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을 화목하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지만 그것을 깨뜨리는 것도 마음이었습니다.
아, 아카시나무 사이로 오늘의 일몰이 천천히 그 막을 내리고 있네요.
나는 그만 일어나 눅눅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이 무렵의 산길은 적적할 만큼 조용해서 좋지요. 둥지를 찾아드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와 그들의 저녁 인사는 마음을 늘 아늑하게 만들어 주지요.
산을 다 내려와 산자락 샘터에서 손을 씻을 때입니다. 머리가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이를 어쩌나요. 팥배나무 벤치에 모자를 둔 채 그냥 내려왔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잊었나 봅니다. 땅거미가 지는데 어쩔까 망설였습니다. 거기까지 다시 올라가려면 30여 분은 걸려야 합니다. 그래도 모자를 거기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모자가 꼭 중요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놓고 오는 버릇이 자꾸 생기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거기에 모자를 벗어놓고 온 적이 있었지요. 한낮이라 다시 올라갔을 때는 이미 모자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생일 선물로 받은 모자였는데 아쉬웠습니다. 무엇이든 순차적으로 해오는 과정 중에 다른 생각이 슬몃 끼어들면 당연히 해오던 그다음 일을 놓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자를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가파르다면 가파른 그 산길을 다시 올랐습니다. 마음이 자꾸 급해졌습니다. 한참을 오르려니 온몸에 땀이 솟고, 다리마저 후들거렸습니다. 허둥지둥 산을 오르며 생각해보니 내가 그 벤치에 놓고 온 건 모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화목했던 우리 집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화목했던 시절을 어딘가에 놓아두고 여기까지 금이 간 채로 달려왔습니다. 그걸 되찾아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놓고 온 모자 하나는 잃어버릴까봐 허둥지둥 달려가면서 그 보다 몇 곱절 중요한 것은 외면했습니다.
여름날이라 숲속은 금방 어두워집니다. 산 중턱에 올라서자, 팥배나무 벤치로 눈길이 먼저 갔습니다. 다행입니다. 거기 모자는 벗어둘 때의 모습 그대로 있습니다. 잃어버릴 뻔한 모자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마음은 먼 곳에 둔 채 나 혼자 여기 머물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