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자작나무 숲에서

자작나무 숲에서

by 이규섭 시인 2018.05.11

자작나무 숲이 보고 싶었다. “가봐야지” 몇 해 벼르다 지난 연휴 마지막 날 자작나무 숲을 찾아 이른 시각 길을 나섰다. 순백의 자작나무는 설렘이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시베리아 설원과 자작나무 숲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겨울 배우 최불암이 젊은 후배들과 조우했던 곳도 강원도 인제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다.
자작나무 숲은 동절기 산불예방 기간인 이달 15일까지 입산을 통제한다. 산림청 누리집을 검색해 보니 황금연휴를 맞아 지역경제 활성화와 산림 복지 서비스 차원에서 조기 개방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명품 숲이 쉽게 자태를 드러낼 리 만무하다. 주차장에서 3.2㎞ 올라가야 만난다.
일찍 도착한 탓인지 자작나무 숲 들머리 ‘원대산림안내 초소’는 문이 닫혔다. 탐방로 안내도엔 오르는 길이 두 곳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린다. 어느 곳으로 가던 자작나무 숲을 만나지만 갈 때는 오른쪽 임도(林道), 내려올 때는 왼쪽 임도로 표시해 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오른쪽 임도로 올랐다. 옛 산판 길을 정비하여 폭은 넓으나 경사가 가파른 편이다. 들머리부터 자작나무가 띄엄띄엄 양쪽에 도열하여 반긴다. 싱그러운 오월의 초록 향기를 맡으며 걸어 지루하지 않다. 땀은 흘러도 기분은 상큼하다. 쉬엄쉬엄 한 시간 조금 더 걸려 자작나무 숲에 도착했다.
자작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이뤘다. 윤기 나는 하얀 피부와 곧게 뻗어 훤칠한 몸매가 눈부시고 당당하다. 순백의 화사함이 초록의 싱그러움과 어우러져 활력을 뿜어낸다. “참 좋군” 탄성이 신음처럼 나온다. 순백의 자작나무 숲에 서니 절로 순수해진다.
원대산은 원래 소나무가 많았으나 솔잎혹파리가 번져 벌채했다. 그 자리에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자작나무 70만 그루를 심었다. 수령은 2030, 혈기 왕성하다. 미래를 내다본 수종 선택이 돋보인다. 2008년부터 숲 유치원으로 개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2년부터 탐방로 등을 정비한 뒤 일반에 개방했다.
자작나무는 불에 타면서 ‘자작∼자작∼’소리를 낸다고 하여 붙여진 우리말 이름이다. 결혼식을 올린다는 ‘화촉’의 ‘화’는 자작나무를 의미한다. 불이 귀하던 시절, 자작나무를 잘게 깎아 첫날밤 등잔불을 밝혔다고 전해져 온다. 자작나무는 하얀 표피만 고결한 게 아니라 속살도 황백색으로 우아하다. 팔만대장경 목판 재료와 경주 천마총 말안장을 장식한 천마도 재질로 쓰였다니 역시 격이 높은 나무다.
쉼터 원두막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다. 설백의 옷을 걸친 자작나무는 하얀 두루마리 입고 표표히 서 있는 조선의 선비를 닮았다. 쭉쭉 뻗은 자태에 기개와 결기가 느껴진다. 선비의 넉넉한 품격과 서릿발 같은 기상이 넘친다. 자작나무 옹이는 형형한 눈빛이다. 늘 깨어 있으라는 목어(木魚)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탐욕과 비리로 얼룩지고, 조작과 갑질로 소란한 세상을 침묵의 언어로 꾸짖는다. 자작나무 숲을 왜 ‘숲의 백미’라 부르는지 자작나무 숲에 와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