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100번째 생신, 100번의 고민

100번째 생신, 100번의 고민

by 안양교차로 2018.02.22

어제는 고모님 100번째 생신이었다.
고종사촌이 며칠 전 내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백수라며. 어머니가 백수잔치를 한사코 반대하셨다고. 그렇다고 그 말씀대로 안 해 드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며 꼭 나와달라 했다. 그게 자식의 당연한 도리 아닌가, 그 말을 내가 했다.
모임 장소인 신당역 근처 음식점에 모두 모였다. 고종사촌과 그의 식구들, 그리고 주위 분들. 그 자리에서 백수하신 고모님을 뵙고, 축하 인사를 드리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백수하신 고모님은 연세와 달리 정정하셨다. 노약하신 모습이 완연했지만 나름 꼿꼿하셨다. 음성도 또렷하셨고 총명하심도 여전하셨다. 턱밑에 턱받이를 하셨는데 잡수시는 것만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예전 텔레비전에서 백수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접할 때면 괜히 뿌듯했다. 왠지 인간승리 같은, 인류 의학의 위대한 업적 같은, 100년이라는 한계를 돌파한 것 같은 인간 정신이 나를 우쭐하게 했다. 무엇보다 그런 기적이 내게도 닥쳐올지 모른다는 수명 연장의 기대감도 있었다. ‘뭐, 100살이래?’ 남의 일임에도 나의 일처럼 탄성을 질렀다.
100번째 생신 잔치도 끝났다. 고모님을 한 번 더 뵙고, 오래 건강히 사시라고 축수를 드리고 몇몇은 전철을 타러 가느라 걸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알게 된 70줄이거나 80줄에 든 분들이었다. 백수를 하신 고모님을 방금 뵙고 와 그런지 모두 말이 없었다. 백수가 우리에게 먼 시절일 때에는 그게 축복이었는데 막상 현실에 와닿고 보니 다른 느낌이었다. 피하고 싶은, 이 닥쳐온 현실이, 자신에게도 닥쳐올지 모를 이 현실이 좀은 우울하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은 나만 이었을까.
내 주변만 해도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내놓고 전전긍긍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말 꺼내기 어렵지 꺼내놓고 보면 집집마다 그런 일로 고민 중이다. 처음엔 자식들이 돌아가며 모셨고, 그러느라 형제간의 불화가 커져 더는 어찌할 수 없어 보내드리는 곳이 그곳이다. 무엇보다 가족도 못 알아보는 치매에 걸려있다면 그 고통은 더욱 크다. 그런데 실은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있다. 지루한 장기간의 요양이다.
눈앞에 닥쳐온 백수 인생을 생각한다. ‘갈 준비가 안 됐다고 일러라’는 백수 인생 노래도 있지만 마냥 웃으며 부를 일이 아니다. 생명을 오래 지속하려면 가족 중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출생 못지않게 죽음에 관한 일도 심각해졌다.
100이란 완성의 기호이다. 그런데 우리는 100번째 생신을 능가하는 생존을 꿈꾼다.
시아버지의 부음을 알리며 들려주더라는 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더 사시고 싶어 하시는, 장기간 투병 중인 시아버지 귀에 대고 늙은 딸이 말하더란다. 아버지, 죽는 걸 두려워 마세요. 캄캄한 저승을 가시다가 혹 불빛을 만나면 그 불을 따라가세요. 먼저 가 계신 엄마를 만나실 거예요. 두려워 마시고 잘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더 사시고 싶어 하던 그이의 시아버지는 가셨단다.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과 그 때문에 힘겨워하는 자식들 사이에 지금 인륜적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오래 사는 일이 정말 축복인가? 100번의 고민을 해봐도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