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너무 늦게 놀러가지 말자

너무 늦게 놀러가지 말자

by 한희철 목사 2018.02.21

‘인간’(人間)이란 말 그대로 ‘사람 사이의 존재’입니다. ‘사이의 존재’라는 말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겠고요. 독불장군을 자처하는 이들이 아주 없지는 않거니와, 본디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말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그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이겠지요. 언어는 각 사람의 존재를 규정할 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기도 하고, 지켜가기도 합니다.
건성으로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별 뜻 없이 가볍게 하는 말들이지요. 언제 한 번 얼굴 보자, 시간 되면 만나서 밥 한 번 먹자, 그중 쉽게 하는 말들입니다. 결코 거짓은 아니지만 진심과는 거리가 있는 말들을 가볍게 합니다.
가벼운 말에 대해서는 대답도 가볍습니다. 그래 서로 시간 내보자, 언제든지 만나자, 별 부담 없이 대답을 합니다.” 가볍게 하는 대답 중에는 언제 내가 한 번 갈게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가 한 번 갈게, 제가 한 번 들를게요, 돌이켜 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하며 살아가는지요.
전화를 한 이는 친구였을 듯싶습니다.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목련 그늘이 좋다고, 꽃 지기 전에 놀러 오라고 전화를 합니다. 어디 보여주고 싶은 것이 목련이었을까요, 꽃을 핑계로 서로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가볍고 즐거운 전화, 분명 대답도 흔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러 가지 못합니다.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시간을 내야지 찾아가야지 했지만 바쁘게 살다 보면 발목을 잡는 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결국은 보러 오라던 목련을 두고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야 놀러 갑니다. 나 왔다고 친구를 부릅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도 친구가 못 들은 척 나오지를 않자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는 것은 때늦은 미안함 때문입니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목련 대신 조등(弔燈)입니다. 조등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립니다. 조등이 흔들리는 것은 겨울바람 때문이 아니라 앞을 가리는 뜨거운 눈물 때문입니다.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입니다. 뭐가 급해 그리 서둘러 질 수가 있냐고, 훌쩍 떠난 친구를 탓하지만 모두가 압니다. 무심한 것은 일찍 진 친구가 아니라, 너무 늦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명절 설을 앞두고 읽었던 나희덕의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는 마음을 아릿하게 합니다. 저마다에겐 저만의 꽃을 피우고 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 시간에 맞출 일도, 너무 늦게 찾아갈 일도 아닙니다.
이번 명절엔 누구를 찾아가야지 생각했는데, 때마침 전해진 소식은 초등학교 친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입니다. 결국은 또 한 번 늦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