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꿀꿀한 날의 군고구마

꿀꿀한 날의 군고구마

by 권영상 작가 2017.12.07

춥고 꿀꿀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기온이 계속 내려가고 있다. 창밖엔 바람이 분다. 해는 게으른 사내처럼 한 번도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거운 구름은 연실 산 너머 동쪽으로 이동 중이다. 눈이라도 내릴 건지 하루 종일 우중충하다. 일몰이 가까워오는 이런 시각엔 의욕조차 없다.
“안에 사람 있어요?”
그 무렵이다.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문을 여니 옆집 이형이다. 이형이 장갑 낀 두 손안에 담아온 걸 내 앞에 내민다. 군고구마다. 휴지 한 장 위에 고구마 네 개를 받쳐왔다. 집에 난로를 들여놓았는데 그 기념으로 구워봤단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이형이 넘겨주는 군고구마를 휴지째 받았다. 군고구마 뜨거운 열기가 내 손으로 훅 넘어왔다.
“날도 꿀꿀한데 겨울 추억을 맛보세요.”
그러고는 돌아섰다. 정확히 군고구마 세 개와 구운 토란 하나다. 꿀꿀하던 나의 저녁이 금방 따스하게 바뀌었다. 군고구마 껍질을 벗겨 한입 물었다. 속이 노란 호박고구마다. 요 잘 익은 군고구마가 축 처진 나를 달아오르게 한다. 구운 토란은 눈에 익은 놈이다. 내가 키운 놈이다. 지난 가을 토란을 캐어 들고 제일 먼저 찾아간 게 이형 집이다. 조리하는 방법을 알 길이 없었다. 그때 좀 드린 건데 그게 이렇게 따끈하게 익어서 구운 토란으로 돌아왔다.
“정말 멋을 아는 사람이야!”
군고구마를 먹고 난 찬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어느 날, 잘 아는 친구가 난데없이 시골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다. 대접할 게 마땅찮아 난감해하는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그때에도 이형이 바깥에서 나를 불렀다.
“포도를 좀 따왔어요. 손님 오신 것 같아서.”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의 농장에 달려가 따왔다며 포도 한 바구니를 건넸다.
이런저런 고마움을 생각하며 채소 통에 넣어둔 맥주 두 통, 감 두 개를 꺼내 들고 이형 집을 향했다. 대문에 들어서는데 ‘꿍짝꿍짝’이다.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추억 속의 사랑의 트위스트......' 이형이 좋아하는 뽕짝이 울리고 있다. 방안에 틀어놓은 노래가 새어 나와 마당을 들썩거린다. 이형은 볼륨을 잔뜩 높여놓고 듣는 흘러간 가요를 좋아한다.
“날이 꿀꿀해서 기분전환 좀 하려구요.”
이형이 내가 가져간 맥주를 받아들며 노래의 볼륨을 낮추었다. 이형도 오늘 같은 날은 나처럼 의욕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이형의 등 뒤로 거실에 놓은 난로가 보인다. 들어와 손 좀 녹이고 가라 한다. 손사래를 치고 나오는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온 동네를 주름잡던 그대애애!’ 노래 한 자락이 흘러나온다.
돌아오는 대로 그 기분으로 발장단을 치며 밥을 짓고, 시금칫국을 만들고, 생선을 구웠다. 늦은 밤 잠자리를 펼 때도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를 흥얼거렸다. 이형이 준 군고구마와 상하이, 상하이 덕분에 꿀꿀한 저녁과 밤을 넘긴다.
옆집 이형에게 나는 아직 배울 게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