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서울서 옛날식으로 살기

서울서 옛날식으로 살기

by 이규섭 시인 2017.12.01

서울에서 옛날식으로 산다는 건 힘들고 고달프다. 김장은 겨울철 반 양식으로 겨울살이 준비의 통과의례다. 김장 날짜를 잡은 뒤 배추를 가지려 강원도 철원까지 갔다. 친척이 농사지어 공짜로 주니 5, 6년째 이어진 연례행사다.
지난해 이맘때는 배추를 밭에서 직접 뽑았다. 올해는 수은주가 빙점 아래로 일찍 곤두박질쳐 뽑아서 덮어 놓았다. 배추는 크기가 고르지 않지만 얼추 100포기 정도 된다. 무와 갓, 쪽파 등 양념소에 들어갈 부수 재료까지 챙겼다. 다음 날, 김장 준비에 팔을 걷어붙인다. 무와 갓, 쪽파를 씻고 채칼로 무를 썬다. 찹쌀죽도 미리 쑨다. 배추를 절이는 작업은 품이 많이 든다. 절임 배추를 선호하는 요인이다.
배추 겉껍질은 벗겨내고 반으로 쪼갠 뒤 칼집을 낸다. 소금으로 배추 숨을 적당히 죽이는 것은 경험이 좌우한다. 셋째 날, 새벽 5시 깜깜한 마당에 나와 대문 옆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배추를 씻는다. 3인조가 돼야 수월하다. 세 차례 헹궈 바구니에 물이 빠지게 차곡차곡 쌓는다. 허리가 결리고 아프다. 늙어도 남자라고 힘쓰는 일은 도맡아 하면서 “내년부턴 그만두자”고 연신 투덜거린다.
절인 배추를 마당에서 2층으로 옮기기도 만만찮다. 들통에 밧줄을 연결하여 올린다. 밑에서 담아주고 끌어올리는 작업은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야 한다. 김장은 양념이 맛을 좌우한다. 무채 갓 쪽파, 다진 마늘과 생강, 고춧가루, 찹쌀풀, 매실청을 넣고 굵은 소금과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다. 젓갈을 넣지 않고 담백하게 만드는 경상도식이다.
단독주택에 30년 넘게 붙박이로 살다 보니 이웃에서 일곱 분이나 일손을 도우러 왔다. 김장 품앗이다. 배추에 양념을 발라 김치 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며느리가 손자와 함께 와 일손을 거든다. 김장이 끝날 무렵 주문해 놓은 떡이 배달됐다. 노란 배추 속잎에 삶은 돼지고기와 양념을 얹어 먹는다. 나눔의 정이 담긴 품앗이 맛이다.
일손을 거든 이웃에게 김장 맛을 보라며 떡과 함께 조금씩 나눠준다. 며느리에겐 겨울을 나도록 넉넉하게 챙겨준다. 사돈에게도 보낸다. 아들과 사는 질녀에게 줄 김치도 담는다. 힘들고 고달파도 김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다. 이사 온 뒤 몇 해 동안은 작은 화단일망정 김장독을 묻고 보관했다. 김치냉장고가 대중화되면서 옛날식 저장 방식에서 벗어났다. 김장 뒤 쓰레기처리도 녹록지 않다. 올해는 일반종량제 봉투로 배출할 수 있어 한결 수월하다.
젊었을 적엔 힘들어도 옛것을 지킨다는 알량한 긍지가 있었다.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김장도 필수 아닌 선택이 됐다. 올해 김장할 계획이 없다는 주부가 절반 넘는다. 그때그때 사 먹는 가정이 늘었다. 김장을 포기한 사람이란 의미의 ‘김포족’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김장은 일상에서 멀어져 세태의 변화를 실감한다. 김장뿐만 아니다. 메주를 쒀서 봄에 장을 담그는 과정도 쉽지 않다. 옥상은 가을철이면 무말랭이, 무청, 호박고지, 튀김고추를 말리느라 일기 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한 세대 넘게 힘에 겨운 옛날식을 고집스레 고수하며 살았으니 이젠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