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秋憶)’ : 낙엽과 새싹
‘추억(秋憶)’ : 낙엽과 새싹
by 강판권 교수 2017.12.01
낙엽은 생명을 잃은 상태지만 나무는 낙엽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길거리에 낙엽이 바람에 이리저리 뒹군다. 바람 따라 어디론가 가는 낙엽은 다른 식물의 영양분으로 작용한다. 아무리 작은 낙엽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최상의 보금자리일 수 있다. 그러나 간혹 낙엽을 주워서 책갈피에 넣어두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밟고 지나간다. 학교의 관리인들은 매일 낙엽을 쓸어 담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몇 년 전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이 살고 있는 십이령 보부상 길을 다녀왔다. 나는 서울 탐방객과 함께 늦가을 낙엽의 진수를 맛보았다. 십이령 보부상 길 일부 구간에는 금강송과 더불어 살아가는 참나무 계통의 나무가 적지 않다. 나는 일행 모두 굴참나무와 상수리 나뭇잎에 눕도록 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했다.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다. 걷기만 하다가 ...주단 같은 낙엽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니 황홀했던 것이다. 낙엽에 누워서 하늘을 보는 것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어른으로 살면서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스스로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이 아주 간단한 행동에 무척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억누르고 있던 욕망을 분출했기 때문이다.
울진 십이령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보부상 길이다. 이곳은 소설가 김주영 작품 중 ‘객주’의 배경이기도 해서 지금은 아주 유명하다. 보부상들은 울진 바다의 물산을 내륙지역 봉화와 안동 등으로 가져가서 팔고, 다시 내륙의 물건을 울진으로 가져와 판매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보부상의 ‘보(褓)’는 작고 귀한 물건을 싸는 보자기를, ‘부(負)’는 등에 짊어지는 큰 물건을 뜻한다. 현재 십이령 보부상 길은 자연생태의 보존을 위해 5월부터 11월까지만 운영하지만, 매년 찾는 사람이 늘어날 만큼 인기 높은 치유 코스다. 나는 특히 울진 십이령 보부상 길의 탐방에서 반드시 현지인과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현지인들이 만든 유료 점심도 지친 어깨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했다.
나는 낙엽을 볼 때마다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 그리고 가곡의 멜로디를 빌린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중 14번’의 2악장을 떠올린다. 음악은 아주 슬픈듯하지만 슬픔의 끝자락에 새싹 같은 희망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보면 쓸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지만 쓸쓸한 기분을 넘어야 기쁨도 돋는다. 낙엽이 새순을 잉태하듯이 쓸쓸함과 기쁨은 언제나 한 몸이다. 그래서 나는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자주 바라본다. 나무는 잎이 떨어진 자국을 잘 보존해야 한다. 자국에 상처를 입으면 새로운 잎을 만드는데 힘들기 때문이다.
낙엽은 나무에게 온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의 흔적이다. 낙엽은 죽음이지만 다시 태어날 소녀 같은 새싹에게 자릴 남기고 떠난다. 내년에 낙엽이 남긴 자리에 어떤 모습의 잎이 탄생할지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렌다. 그래서 낙엽은 나에게 희망을 메시지를 준다.
나는 몇 년 전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이 살고 있는 십이령 보부상 길을 다녀왔다. 나는 서울 탐방객과 함께 늦가을 낙엽의 진수를 맛보았다. 십이령 보부상 길 일부 구간에는 금강송과 더불어 살아가는 참나무 계통의 나무가 적지 않다. 나는 일행 모두 굴참나무와 상수리 나뭇잎에 눕도록 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했다.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다. 걷기만 하다가 ...주단 같은 낙엽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니 황홀했던 것이다. 낙엽에 누워서 하늘을 보는 것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어른으로 살면서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스스로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이 아주 간단한 행동에 무척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억누르고 있던 욕망을 분출했기 때문이다.
울진 십이령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보부상 길이다. 이곳은 소설가 김주영 작품 중 ‘객주’의 배경이기도 해서 지금은 아주 유명하다. 보부상들은 울진 바다의 물산을 내륙지역 봉화와 안동 등으로 가져가서 팔고, 다시 내륙의 물건을 울진으로 가져와 판매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보부상의 ‘보(褓)’는 작고 귀한 물건을 싸는 보자기를, ‘부(負)’는 등에 짊어지는 큰 물건을 뜻한다. 현재 십이령 보부상 길은 자연생태의 보존을 위해 5월부터 11월까지만 운영하지만, 매년 찾는 사람이 늘어날 만큼 인기 높은 치유 코스다. 나는 특히 울진 십이령 보부상 길의 탐방에서 반드시 현지인과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현지인들이 만든 유료 점심도 지친 어깨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했다.
나는 낙엽을 볼 때마다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 그리고 가곡의 멜로디를 빌린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중 14번’의 2악장을 떠올린다. 음악은 아주 슬픈듯하지만 슬픔의 끝자락에 새싹 같은 희망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보면 쓸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지만 쓸쓸한 기분을 넘어야 기쁨도 돋는다. 낙엽이 새순을 잉태하듯이 쓸쓸함과 기쁨은 언제나 한 몸이다. 그래서 나는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자주 바라본다. 나무는 잎이 떨어진 자국을 잘 보존해야 한다. 자국에 상처를 입으면 새로운 잎을 만드는데 힘들기 때문이다.
낙엽은 나무에게 온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의 흔적이다. 낙엽은 죽음이지만 다시 태어날 소녀 같은 새싹에게 자릴 남기고 떠난다. 내년에 낙엽이 남긴 자리에 어떤 모습의 잎이 탄생할지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렌다. 그래서 낙엽은 나에게 희망을 메시지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