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일기는 마음의 빗질

일기는 마음의 빗질

by 이규섭 시인 2017.11.17

일기는 마음에 고인 감정 퍼내기다. 감정을 퍼내지 않으면 고인 물이 썩듯 상처가 되어 곪는다. 사춘기 시절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이다. 하늘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별리의 아픔이다. 딸 넷을 낳고 뒤늦게 얻은 아들이라 모정은 애틋했다. 뜨겁던 모정만큼 그리움이 사무쳤고 외로움은 깊었다. 철필에 잉크를 찍어 일기장에 감정의 앙금을 풀어냈다. 일기는 사춘기 시절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일기는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해주는 빗질과 같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잡동사니 생각들을 손 글씨로 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리된다. 일기는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반추의 거울이다.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힌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던 일기는 군대 생활 때도 이어졌다. 서류 크기로 일기장을 만들어 행정반 서류에 끼워 보관하며 일기를 썼다. M1 소총의 무게만큼 나라를 생각한다는 치기 어린 문장도 기억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짜를 채웠던 일기는 환갑 넘게 이어졌다. 퇴직 이후 생활이 단조로워지면서 내용도 무미건조해졌다. 손자 육아일기로 전환해 볼까 생각했으나 함께 사는 게 아니라 포기했다.
보관도 문제다. 대학노트, 8절지 묶음, 일기장 등 크기와 두께가 제각각인 일기를 박스에 담아 옥탑 창고에 보관했다. 오래 묵은 일기장은 퀴퀴한 곰팡내를 풍기며 푸석푸석 부서진다. 박스를 보관할 장소도 비좁다. “버려야 하나, 보관해야 하나” 그것이 문제였다.
장고 끝에 아깝지만 버리기로 결심했다. 자서전을 남길 위인도 못 된다. 죽음과 함께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표지와 이름을 찢은 일기장을 스크랩 북, 버려야 할 책과 함께 고물상에 직접 넘겼다. 한동안 허탈했다. 일기 대신 그날그날의 일과를 메모하는 습관은 여전하다. 휴대폰에 ‘메모장’이 있고 ‘폰 플래너’에 일정을 기록할 수 있지만, 볼펜으로 다이어리에 쓰는 메모가 확실하고 생각을 빗질하듯 뚜렷하게 정리된다.
NIE(신문활용교육) 강의를 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일기 쓰기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기는 글쓰기와 사고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하루의 일과를 나열하지 말고 한 가지 기억나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쓰는 게 좋다고 권장한다. 일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난중일기’를 남긴 이순신,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 ‘존현각일기’로 스스로를 반성한 정조 임금 사례를 곁들인다.
학교 현장에서 일기 숙제가 사라지면서 기본적인 표현력과 문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마저 실종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5년 ‘일기 검사는 아동의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면서 교육부에 권고한 이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일부 학부모들도 아이 일기를 통해 자신의 집 속 사정이 알려지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니 일선 교사들은 꺼릴 수밖에 없다. 숙제 없이 일기를 자발적으로 꼬박꼬박 쓰는 초등학생이 얼마나 될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기록하는 일기가 사생활 침해라는 덫에 걸려 교육현장에서 사라지는 풍토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