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내리는 가을 기척
소나기 내리는 가을 기척
by 권영상 작가 2017.09.07
아침나절에 찾아온 친구가 볼일을 보고 일어섰다. 백암까지 그를 태워주고 돌아올 땐 장을 보기로 했다. 차를 몰아 시내 근처에 세워놓고 버스 정류장까지 그와 함께 걸었다.
친구를 태워 보내고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다. 한 무더기 비가 후두두 쏟아진다.
보통 굵은 비가 아니다. 허둥지둥 건널목을 건너, 보아두었던 철물점으로 뛰어들었다. 사내 두엇이 근심스레 비를 내다보고 섰다. 나는 백시멘트 한 봉지를 부탁했다. 비도 피할 겸 주인이 천천히 찾아주길 바라며 서 있는데, 뒤쪽 발치에서 대뜸 집어 들고 ‘2,300원인데 계산하기 쉽게 2,000원 주세요’ 한다. 이때처럼 재빠르게 깎아 계산해주는 주인이 싫어 보일 때가 없다.
비는 철물점에 들어올 때보다 더 기운차게 내린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빗물에 젖은 신발 속이 움직일 때마다 쿨럭거린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 빗길에 나섰다. 마트를 찾아가 우유, 두부, 양배추를 사가지고 돌아 나오며 보니 출구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다. 비는 여전한데 누군가 언성을 높인다.
“원하는 대로 그만 살어!” 손가방을 들고 선 여자다. “잔소리 없는 세상 타령하더니 잘됐네 뭐. 거기 가 실컷 혼자 살아봐!”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빗속으로 우산을 집어던진다. 우산살이 부러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검정 우산이다. 인생을 부단하게 산, 머리칼이 희끗희끗해 보이는 예순 줄의 사내다.
“우산이 뭔 죄래!”
퉁명스럽게 내뱉는 여자의 머리칼에 빗방울이 안개처럼 보얗게 얹혀있다.
서로 티격태격하며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여기 마트 출입구에 들어선 모양이다. 그러니 상한 감정을 금방 참아낼 수도 없겠다. 여느 사람들처럼 티격태격하며 인생을 살아온 부부다.
그들 곁에 서 있는, 마트에서 나온 예닐곱 명 사람들은 빗소리 때문인지 이들 부부의 다툼에 무심하다. 하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의아히 여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한낮에 장을 보러 오는 나이라면 이 부부를 흔드는 바람이 뭔지 척 보면 알 일이다. 다들 살면서 겪었을 그 뻔한 일에 눈길을 보내는 것이 오히려 싱겁다. 듣고도 못 듣는 척, 보고도 못 보는 척하는 그들이 있어, 어쩌면 예순 나이의 부부가 언성을 높일 수 있겠다.
비는 여전히 거칠게 길바닥을 때린다. 소낙비치고는 길다. 나는 빗길로 나섰다. “아, 소원이면 나가 살어!” 그러는 여자 목소리가 등 뒤에서 칼칼하게 날아온다.
장을 본 것을 차에 싣고 시동을 걸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한길에 올라섰을 때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뚝 그친다. 아니, 이쪽에는 아예 비가 오지 않았다. 길이 뽀얗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은 영 딴판이다. 윈도 와이퍼를 끄고 창문을 연다.
아직도 그들 부부는 다투고 있을까. 소나기 그쳤다면 다툼도 그쳤겠다. 본디 소나기란 잠깐 뒤에 그치는 천성이 있으니까. 부부싸움이란 것도 가을 소나기처럼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쳐선 한 줄기 요란히 뿌리고 가는 게 똑같다.
10여 분을 달려 집 앞에 당도하니 길 위에 물이 흥건하다. 빗물에 쓸려간 흙자국도 보인다. 징검다리처럼 우리 동네에 소나기를 뿌리고 간 온 모양이다. 바야흐로 소나기 내리는 가을이다. 어디쯤 가을 들꽃들이 외로이 피고 있겠다.
친구를 태워 보내고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다. 한 무더기 비가 후두두 쏟아진다.
보통 굵은 비가 아니다. 허둥지둥 건널목을 건너, 보아두었던 철물점으로 뛰어들었다. 사내 두엇이 근심스레 비를 내다보고 섰다. 나는 백시멘트 한 봉지를 부탁했다. 비도 피할 겸 주인이 천천히 찾아주길 바라며 서 있는데, 뒤쪽 발치에서 대뜸 집어 들고 ‘2,300원인데 계산하기 쉽게 2,000원 주세요’ 한다. 이때처럼 재빠르게 깎아 계산해주는 주인이 싫어 보일 때가 없다.
비는 철물점에 들어올 때보다 더 기운차게 내린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빗물에 젖은 신발 속이 움직일 때마다 쿨럭거린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 빗길에 나섰다. 마트를 찾아가 우유, 두부, 양배추를 사가지고 돌아 나오며 보니 출구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다. 비는 여전한데 누군가 언성을 높인다.
“원하는 대로 그만 살어!” 손가방을 들고 선 여자다. “잔소리 없는 세상 타령하더니 잘됐네 뭐. 거기 가 실컷 혼자 살아봐!”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빗속으로 우산을 집어던진다. 우산살이 부러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검정 우산이다. 인생을 부단하게 산, 머리칼이 희끗희끗해 보이는 예순 줄의 사내다.
“우산이 뭔 죄래!”
퉁명스럽게 내뱉는 여자의 머리칼에 빗방울이 안개처럼 보얗게 얹혀있다.
서로 티격태격하며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여기 마트 출입구에 들어선 모양이다. 그러니 상한 감정을 금방 참아낼 수도 없겠다. 여느 사람들처럼 티격태격하며 인생을 살아온 부부다.
그들 곁에 서 있는, 마트에서 나온 예닐곱 명 사람들은 빗소리 때문인지 이들 부부의 다툼에 무심하다. 하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의아히 여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한낮에 장을 보러 오는 나이라면 이 부부를 흔드는 바람이 뭔지 척 보면 알 일이다. 다들 살면서 겪었을 그 뻔한 일에 눈길을 보내는 것이 오히려 싱겁다. 듣고도 못 듣는 척, 보고도 못 보는 척하는 그들이 있어, 어쩌면 예순 나이의 부부가 언성을 높일 수 있겠다.
비는 여전히 거칠게 길바닥을 때린다. 소낙비치고는 길다. 나는 빗길로 나섰다. “아, 소원이면 나가 살어!” 그러는 여자 목소리가 등 뒤에서 칼칼하게 날아온다.
장을 본 것을 차에 싣고 시동을 걸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한길에 올라섰을 때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뚝 그친다. 아니, 이쪽에는 아예 비가 오지 않았다. 길이 뽀얗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은 영 딴판이다. 윈도 와이퍼를 끄고 창문을 연다.
아직도 그들 부부는 다투고 있을까. 소나기 그쳤다면 다툼도 그쳤겠다. 본디 소나기란 잠깐 뒤에 그치는 천성이 있으니까. 부부싸움이란 것도 가을 소나기처럼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쳐선 한 줄기 요란히 뿌리고 가는 게 똑같다.
10여 분을 달려 집 앞에 당도하니 길 위에 물이 흥건하다. 빗물에 쓸려간 흙자국도 보인다. 징검다리처럼 우리 동네에 소나기를 뿌리고 간 온 모양이다. 바야흐로 소나기 내리는 가을이다. 어디쯤 가을 들꽃들이 외로이 피고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