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왕고모의 용돈 배달

왕고모의 용돈 배달

by 이규섭 시인 2017.08.18

올여름 휴가는 희비가 엇갈렸다. 일 년 새 부쩍 쇠약해진 누님들 얼굴을 보니 짠하고, 자연을 바라보는 손자의 열린 마음이 흐뭇했다. 여든 중반의 둘째 누님은 총총하던 눈빛이 흐려졌고 기억력이 낡은 필름처럼 가끔 끊긴다고 한다. 간간이 어지럼증세가 와도 매형에게 삼시세끼를 챙겨드린다. 올 들어 끼니 챙기기가 귀찮고 힘들어 “요양시설에 들어가 살자” 제의했다고 한다. 평생 밥은커녕 설거지도 안 해본 매형은 “밥은 내가 한다.”며 밥솥에 손을 넣어 물 대중까지 해봤다니 코끝이 찡해진다. 몸은 불편해도 요양시설은 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매형은 걷기가 불편할 때도 남 보기 흉하다며 지팡이를 짚지 않는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정신 줄이 가끔 외출을 나갔다 오긴 해도 여름휴가 때 친인척을 만난다는 기다림을 낙으로 삼는다. 2년 만에 피서지에 온 처남의 다섯 살 손자 이름을 기억하며 신사임당이 그려진 지폐 한 장을 준다.
육남매 중 큰 누님은 여든아홉. 신산스러운 세월을 모질게 버텨 왔듯 강인한 정신력으로 삭아버린 육신을 지탱한다. 올여름 휴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병석에 누웠어도 이곳이 눈에 선할 것이다. 휴가 첫날 저녁 무렵 내게 전화를 하셨다.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하다. 당신의 딸 편에 5만 원을 보낼 테니 손자 주라고 한다. 큰 누님은 손자, 증손자까지 30여 명 넘는데 친정 남동생 손자까지 챙긴다. 휴가지에 배달된 왕고모의 용돈이 애틋하다.
친인척 단체 여름휴가는 15년 넘게 이어져 왔다. 모임 초기에는 장소를 이곳저곳 옮겼으나 10년째 충북 단양의 황토방 펜션을 붙박이 삼았다. 큰 누님의 맏아들 고향인 데다 많은 식솔들이 먹을 식재료를 준비하고 무한정 공급한다. 올해도 갓난아기까지 마흔두 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세월이 가려면 제 혼자 갈 것이지 나이까지 끌고 와 늙고 병들게 만드는가. 내년엔 불참자가 줄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어른거린다.
손자는 어려도 촌수가 높다. 누님 증손자들의 아저씨뻘이다. 초등학생 조카뻘에게 누나라고 부르기에 “네가 아저씨야” 했더니 “아니야!” 거부 반응을 보인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대충 눈치채는 눈치다. 다섯 살짜리에게 여자 숙소에 있는 아저씨 나오라고 하라며 심부름을 시켰더니 “아, 꼬마 아저씨요”하며 달려간다.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던 손자도 시간이 흐를수록 아저씨란 호칭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피서지도 덥기는 마찬가지다. 숨이 턱턱 막힌다. 냇가에 발을 담가도 정수리에 태양이 이글거린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은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다. 아이들 몇 명을 차에 태워 작은 폭포가 흐르는 계곡으로 가면서 “숲과 계곡에는 무엇이 살까요?” 물었더니 “다람쥐, 달팽이, 개구리, 뱀, 거미, 무당벌레요” 앞다퉈 대답한다 “낮에는 무당벌레, 밤에는 무슨 벌레가 보일까요?” 연상 질문을 했더니 그림책에서나 봤을 “개똥벌레요” 대답해 흐뭇하다. 손자가 시린 계곡에 손을 담그며 폭포를 보더니 “참 좋다” 감탄하는 게 대견하다. 아이들은 초록빛 자연을 닮아가고 어른들은 황토빛으로 늙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