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모퉁이를 사유하다
삶과 죽음의 모퉁이를 사유하다
by 정운 스님 2017.05.16
얼마 전 원고에서 헬렌 니어링(1904~1995)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출판사, 1999)의 내용을 소개하며, 그녀의 남편 스코트에 대해 언급했었다. 여기서는 스코트(1898~1987)의 말년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교수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철학으로 이끈 지식인으로 자연과 더불어 산 농사꾼이었다. 그의 삶은 현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줄 뿐만 아니라 종교인인 필자에게도 삶을 되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스코트는 동물 애호를 주장한 채식주의자로서 만물을 자신의 삶과 결부 짓는 자연주의자였다. 차비도 나오지 않는 곳까지 찾아가 강연을 하면서 ‘가난’을 아름다운 여행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물건이나 물질로 삶을 풍족하려는 것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인생관이었다. 스코트는 어느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스코트의 죽음관 또한 소박한 수행자 모습이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는 명구를 좋아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이 죽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병원도 의사도 거부하였다. 또한 법적인 절차나 성직자도 원치 않았고, 어떤 치장이나 번거로운 장례식 없이 그냥 작업복 차림으로 화장되기를 원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ㆍ위엄ㆍ이해ㆍ기쁨과 평화로움을 갖고, 나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필자도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지만, 스코트와 같은 죽음관을 갖고 있거나 자세는 흔치 않은 일이다. 수여 년 전에 입적한 어느 노스님은 제자들에게 ‘절대로 사리 수습도 하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며, 조문객도 받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조용히 입적하셨다. 그냥 그렇게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건너편으로 유유히 건너가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필자도 이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스코트의 인생관과 죽음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생각의 차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스코트의 삶의 방식을 보면서 인생의 청사진을 그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질이 넘치는 세상에 문명의 풍요로움을 겸허히 받아들였던 그의 삶을 통해 한 번쯤 사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스코트는 동물 애호를 주장한 채식주의자로서 만물을 자신의 삶과 결부 짓는 자연주의자였다. 차비도 나오지 않는 곳까지 찾아가 강연을 하면서 ‘가난’을 아름다운 여행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물건이나 물질로 삶을 풍족하려는 것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인생관이었다. 스코트는 어느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스코트의 죽음관 또한 소박한 수행자 모습이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는 명구를 좋아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이 죽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병원도 의사도 거부하였다. 또한 법적인 절차나 성직자도 원치 않았고, 어떤 치장이나 번거로운 장례식 없이 그냥 작업복 차림으로 화장되기를 원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ㆍ위엄ㆍ이해ㆍ기쁨과 평화로움을 갖고, 나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필자도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지만, 스코트와 같은 죽음관을 갖고 있거나 자세는 흔치 않은 일이다. 수여 년 전에 입적한 어느 노스님은 제자들에게 ‘절대로 사리 수습도 하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며, 조문객도 받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조용히 입적하셨다. 그냥 그렇게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건너편으로 유유히 건너가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필자도 이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스코트의 인생관과 죽음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생각의 차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스코트의 삶의 방식을 보면서 인생의 청사진을 그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질이 넘치는 세상에 문명의 풍요로움을 겸허히 받아들였던 그의 삶을 통해 한 번쯤 사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