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살던 집
예전에 살던 집
by 권영상 작가 2017.04.27
남한산성 철쭉을 보러 갔다가 돌아올 때입니다. 문득 들러보고 싶은 그 집이 생각났습니다. 복정 사거리에 이를 그쯤 울컥 밀려오는 그리움. 끝내 거기에서 세곡동 길로 들어섰지요.
세곡동은 오래전에 신혼살림을 하며 잠시 살던 곳입니다. 꼭 35년 전이네요. 이 길을 지날 때면 아무 서러울 것도, 행복할 것도 없는 그 집이 아득히 그리워질 때가 더러 있지요. 나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그 집을 찾았지요.
저쪽 산자락에 보금자리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선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거라고는 없는 서울 변두리 마을. 그 옛날의 기억이 깨질까 봐 천천히 걸어 그 옛집을 찾아냈습니다. 아, 그대로입니다. 붉은 벽돌 2층집. 달라진 거라면 길가 쪽 연탄광이 문구점이 됐다는 것뿐 35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해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옳을지, 오래된 슬픔이라 해야 옳을지요.
문구점을 지나자, 알루미늄 쪽문이 나옵니다. 쪽문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쪽문을 바라보다가 옛 추억에 감전되듯 가만히 손잡이를 잡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안에서 신발 소리를 내며 걸어 나오는 듯합니다.
그때 나는 동해시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에 있었고, 아내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학교에 있었지요. 우리는 그런, 도저히 한데 모여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결혼을 하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젊음이란 때론 호기롭고, 때론 무모하고, 때론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오히려 더욱 사랑하는 열정의 시절이었던 모양입니다.
주말이면 강원도에서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오르내렸지요. 이른바 주말부부. 간신히 집에 도착하면 아내와 아내의 친구가 나를 반겼지요. 아내는 결혼 전부터 있던 척추 연골 탈출로 병가를 내고 있었고, 그 아내를 도와주러 아내의 친구는 직장일을 마치면 먼 변두리 지역 세곡동을 찾아왔지요. 그녀는 헌신적이었지요. 내가 해야 할, 아내의 입·퇴원 수속과 밥을 짓고, 빨래하는 일을 마치 자신의 직분처럼 싫다않고 맡아 했지요.
그 일만이 아니지요. 하룻밤을 묵고 강원도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 그녀는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흔들어주는 작별의 손인사를 받으며 길을 떠났지요. 1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아내는 친구의 조력에 힘입어 병석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 아내와 나는 아내의 근무지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켜보는 우리도 수없이 울었구먼. 어디 가서 살든 아프지 말아요. ”
이사 가던 날, 주인아저씨가 우리 내외의 손을 잡으며 글썽였습니다.
단 1년. 150만 원으로 살던 신혼 단칸방. 방학이면 그 단칸방에서 밥상을 닦아 글을 쓰고, 아내의 손을 잡고 파출소 옆 산길을 오르내리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행운일까요? 아니면 먼 외로움일까요? 35년 전의 꼭 흑백사진 같은 추억 속에 잠시나마 머물다 갈 수 있는 이 일이.
돌아서려는데 2층 계단을 타고 어린 소녀 하나가 내려옵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던 길을 돌아 나왔습니다. 지금쯤 그 아저씨는 머리칼이 하얀 노인이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곡동은 오래전에 신혼살림을 하며 잠시 살던 곳입니다. 꼭 35년 전이네요. 이 길을 지날 때면 아무 서러울 것도, 행복할 것도 없는 그 집이 아득히 그리워질 때가 더러 있지요. 나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그 집을 찾았지요.
저쪽 산자락에 보금자리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선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거라고는 없는 서울 변두리 마을. 그 옛날의 기억이 깨질까 봐 천천히 걸어 그 옛집을 찾아냈습니다. 아, 그대로입니다. 붉은 벽돌 2층집. 달라진 거라면 길가 쪽 연탄광이 문구점이 됐다는 것뿐 35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해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옳을지, 오래된 슬픔이라 해야 옳을지요.
문구점을 지나자, 알루미늄 쪽문이 나옵니다. 쪽문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쪽문을 바라보다가 옛 추억에 감전되듯 가만히 손잡이를 잡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안에서 신발 소리를 내며 걸어 나오는 듯합니다.
그때 나는 동해시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에 있었고, 아내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학교에 있었지요. 우리는 그런, 도저히 한데 모여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결혼을 하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젊음이란 때론 호기롭고, 때론 무모하고, 때론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오히려 더욱 사랑하는 열정의 시절이었던 모양입니다.
주말이면 강원도에서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오르내렸지요. 이른바 주말부부. 간신히 집에 도착하면 아내와 아내의 친구가 나를 반겼지요. 아내는 결혼 전부터 있던 척추 연골 탈출로 병가를 내고 있었고, 그 아내를 도와주러 아내의 친구는 직장일을 마치면 먼 변두리 지역 세곡동을 찾아왔지요. 그녀는 헌신적이었지요. 내가 해야 할, 아내의 입·퇴원 수속과 밥을 짓고, 빨래하는 일을 마치 자신의 직분처럼 싫다않고 맡아 했지요.
그 일만이 아니지요. 하룻밤을 묵고 강원도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 그녀는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흔들어주는 작별의 손인사를 받으며 길을 떠났지요. 1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아내는 친구의 조력에 힘입어 병석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 아내와 나는 아내의 근무지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켜보는 우리도 수없이 울었구먼. 어디 가서 살든 아프지 말아요. ”
이사 가던 날, 주인아저씨가 우리 내외의 손을 잡으며 글썽였습니다.
단 1년. 150만 원으로 살던 신혼 단칸방. 방학이면 그 단칸방에서 밥상을 닦아 글을 쓰고, 아내의 손을 잡고 파출소 옆 산길을 오르내리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행운일까요? 아니면 먼 외로움일까요? 35년 전의 꼭 흑백사진 같은 추억 속에 잠시나마 머물다 갈 수 있는 이 일이.
돌아서려는데 2층 계단을 타고 어린 소녀 하나가 내려옵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던 길을 돌아 나왔습니다. 지금쯤 그 아저씨는 머리칼이 하얀 노인이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