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어머니의 유산

어머니의 유산

by 권영상 작가 2017.04.20

지난 금요일, 종로 5가 씨앗 가게에서 칸나 두 뿌리를 샀습니다. 꽃이 빨간 칸나와 노란 것을 한 뿌리씩 샀지요. 그걸 마당 가운데에 심었습니다.
이들이 잘 커서 푸른 그늘을 만들고, 풍선의 돛처럼 바람을 받아들이고, 빗소리에 민감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보름쯤 지나면 새움이 나올 테고, 5월이 오면 큰 잎을 펼치며 쑥쑥 자라주겠지요.
집에 들어가기 전에 꽃씨 온상도 한번 들여다봤습니다. 잘 자라주고 있습니다. 해바라기, 백일홍, 채송화, 프렌치 메리골드 그리고 상추며 쑥갓도 한 줄씩 뿌렸지요. 손이 많이 가긴 해도 해마다 온상에 모종을 키워 밖에다 냈습니다. 밤공기를 쐬라고 비닐을 좀 열어두고 거실에 들어설 때입니다.
“당신 책상 서랍에서 목화씨 나왔어!”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가 식탁 위를 가리킵니다.
거기 흰 솜이 붙어있는 목화 씨앗 세 개!
자를 찾느라 서랍을 뒤지다 이제는 쓰지 않는 필통 속에서 발견했답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목화 씨앗의 출현에 놀랐습니다. 봉숭아나 접시꽃 씨앗이라면 아, 꽃씨! 하고 말겠지만 상대가 목화 씨앗이고 보니 마음의 울림이 일어났습니다. 대체 어디서 난 목화 씨앗이 이렇게 우리 집에 와 있었을까? 나는 요 근년 목화꽃이든 목화송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어머니가 주신 거구나!”
저녁 수저를 놓을 때쯤 문득 그 목화씨의 정체가 떠올랐습니다. 이웃 동네 아시는 분 집에 들렀는데 그 댁 마당에 핀 탐스러운 목화를 보고 씨앗 세 개를 얻어 왔다고 했었지요. 그때 어머니는 그걸 심어 솜버선을 만들려고 하셨다면서 그 무렵 고향을 찾은 내게 주셨습니다.
나는 식탁 옆에 밀어둔 목화 씨앗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어머니가 가신지 벌써 10년도 더 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목화 씨앗 세 개는 10여 년 만에 펼쳐보는 어머니의 유산인 셈입니다. 불현 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 씨앗 속 좁은 방에 어머니가 앉아계실 것 같습니다. 나는 마치 어머니의 숨결을 느끼려는 듯이 씨앗을 귀에 대어보고, 또 손으로 꼭 움켜잡아 봅니다. 목화솜에 감싸여 있어 그런지, 아니면 어머니의 아득히 남아있는 체온 때문인지 손안이 따스합니다.
목화솜으로 솜버선을 만드시겠다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여름에도 두툼한 머릿수건을 쓰셔야 할 만큼 바람을 타셨습니다. 양말 대신 솜버선을 생각하신 것도 발에 바람이 들어 그러셨던 건 아닐까요? 오랫동안 어머니를 잊고 살았는데, 이 목화 씨앗 세 개가 다시 어머니를 생각하게 합니다.
강낭콩을 심을 때 한 자리를 내어 이 목화 씨앗 세 개를 심어야지, 하면서도 걱정이 앞섭니다. 10년도 더 지난 이 씨앗 속에 목화의 숨결이 남아있긴 할까요?
“천 년을 잠자던 연꽃 씨앗이 깨어났단 소식 어디선가 들었어.”
아내가 내 걱정을 덜어주려고 한마디 합니다. 나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떻든지 잘 키워 솜버선은 못 만들어도 작은 솜방석만은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