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렸습니다. 이천, 원주, 평창, 대관령을 넘어 마침내 강릉에 닿았고, 내처 바다를 향했지요. 겨울이 끝나가는 이쯤, 동해를 보고 싶었습니다. 지난겨울은 너무 캄캄했습니다. 마치 깊은 수렁에 빠져 갈 길을 몰라 하던 때의 고통처럼 어두웠지요. 갑갑하고 혼란스러웠지요. 나만이었을까요?
나는 차를 몰아 바다가 가까운 한 해안가에 멈추었습니다. 저벅저벅 모래벌을 밟아 출렁대는 바다를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이쪽과는 전혀 다른 저쪽 파도 앞에 서면 뭔가 새로운 길을 만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바다는 3월 봄바다답게 짙은 청색입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섬의 아침처럼 탁 트였습니다. 해안의 모래벌판으로 달려오는 파도는 내게 무슨 말인가 들려줄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합니다. 나는 파도 치는 대양과 마주하고 섰습니다. 파도의 반복은 단조롭습니다.
나는 단조로운 이 파도가 밀어 올려놓은 조개껍데기를 따라 걸어봅니다. 어디 성한 곳 하나 없이 닳고 닳은 조개껍데기입니다. 그들 중에는 주둥이가 막힌 푸른 빈 병도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아마 지난날의 거친 파도에 밀려온 게 분명합니다. 이 빈 병도 파도에 휩쓸려 다니느라 성한 곳 하나 없습니다. 긁힌 자국들로 제 빛깔을 잃어 흰색에 가깝습니다.
나는 이 빈 병을 밀어올린 바다를 바라봅니다.
모르기는 해도 이 빈 병은 언젠가 불어난 강물의 대열에 뛰어올라 넘실넘실 바다로 나갔겠지요. 빈 병도 우리들처럼 꿈이 있었겠지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설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꿈. 그 꿈을 찾으러 나가는 빈 병은 참을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겠지요.
그러나 바다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지요. 거기엔 노도와 격랑이 있을 뿐 제가 처한 이 곤경에 대한 질문의 대답을 듣는 일은 어렵지요. 더욱 두려운 건 생존에 대한 위협이었을 테지요. 그 순간 빈 병은 강물의 대열에 올라선 일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빈 병은 문신처럼 새겨진 상처투성이 몸으로 이 해변가에 돌아와 누웠습니다. 나는 주둥이를 막은 병마개를 힘껏 뽑아줍니다. 여태껏 막혀 있었던 숨통을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이 병이 대양으로 나갈 수 있었던 건 주둥이를 막고 있는 병마개 덕분이지요. 하나의 이념에 충실할 수 있었던, 모험심 많은 청년 같은 꿈은 그 때문에 시작되었던 거지요. 나는 이제 빈 병의 완전한 의미를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병마개를 열어두고 자리를 떠납니다. 밤이 오고, 또 바닷바람이 호이호이 불어오면 빈 병은 이 모래벌판에 혼자 누워 그간의 고단함을 털고 노래 부를 테지요. 군중의 무리와 같은 바다에서 얻지 못했던, 아니면 얻었으나 그걸 얻느라 잊었을 노래를 부르겠지요,
이제는 좀 혼자 있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쪽에서 저쪽 먼 곳까지 해안선 모래벌판을 따라 걸어봅니다. 3월의 봄바다가 유채꽃 핀 들판처럼 아름답습니다. 이 바다 내음도 바다가 만들어 보내는 향기일 테지요. 길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강물 같은 대열에 들어서서 앞만 보고 가느라 잊었던 것을 되찾은 기분입니다. 오늘 밤 모래벌판에서 혼자 호오이, 노래 부르는 빈 병을 떠올려 봅니다. 그게 나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