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제암리교회

제암리교회

by 한희철 목사 2017.03.02

관심이 없을 때야 까마득하게 여겨지고 남의 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멀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일도 아닌 중요한 일들이 우리 곁에는 있습니다. 우연히 듣게 된 제암리교회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제암리교회에서는 일본 군인들에 의해 민간인인 우리 국민들이 학살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발안 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 후 계속되는 시위에 대한 경고와 보복으로 민간인 29명을 학살했던 것입니다.
1905년 8월 5일 건립된 제암리교회는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습니다. 그 후 교인들이 증가하여 1911년 교회 건물을 마련하였습니다.
들불처럼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장날이었던 3월 31일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장터에 모인 수많은 주민들이 만세 운동에 동참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협사격을 한 끝에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했습니다.
이는 큰 분노를 일으켜 격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과 학교를 파손하고, 이튿날부터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시위를 했습니다. 4월 3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만세 시위가 있은 지 열흘이 지난 후 일본 헌병들은 제암리와 고주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들을 제암리교회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만세 시위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유인했지만, 실은 거짓이었습니다.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모이게 한 후 총격과 함께 예배당의 문을 걸어 잠그고 짚더미를 던지며 기름을 끼얹은 후 불을 질렀습니다.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이어갔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처제 가족이 고국을 다녀갈 일이 있어 출국을 앞두고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오랜만에 모이면 지난 이야기를 하게 마련이지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제암리교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장모님의 할머니도 제암리교회 교인이었고, 학살이 벌어지던 날 제암리교회로 모이라는 말을 듣고 교회를 향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식사를 차려드리느라 조금 늦게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막 고개로 올라서서 보니 저 멀리 제암리교회가 불에 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암리교회와 관련된 이야기는 잘 알고 있었고 몇 번 방문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다시 맞는 3·1절을 단순한 공휴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으로 제암리교회를 찾아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