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장희빈 묘역에서

장희빈 묘역에서

by 이규섭 시인 2017.02.10

인간의 호기심과 엿보기 심리는 왕릉 관람에서도 드러난다. 서오릉에는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 등 5기의 왕릉이 있는데 장희빈 묘를 찾는 방문객이 많다고 한다. 치맛바람으로 왕실과 조정을 들었다 놨다 한 장희빈이 왕릉에 묻혔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든 국정농단의 여인이 오버랩 되면서 둘러보고 싶었다.
서오릉은 서울의 서쪽에 위치한 고양시 덕양구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 숲이 민낯을 드러낸 계절이라 한산할 줄 알았더니 방문객이 의외로 많다. 관리인은 “평소 산책코스로 인근 주민들이 즐겨 찾는다”고 귀띔해준다. 서오릉에 잠든 왕실 족분 가운데 세인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제19대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주인공들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죽어서 한자리에 모여 있는 셈이다. 다만 장희빈과 암투를 벌였던 최숙빈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20여㎞ 떨어진 파주시 광탄면에 묻혔다. 훗날 아들 영조가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고 왕릉처럼 정자각과 비각을 세웠다.
숙종은 왕비와 희빈, 숙빈과 후궁 등 9명의 여인들 사이에서 6남 3녀를 낳았다. 원비 인경왕후는 딸 둘을 낳았으나 일찍 죽고 그도 스무 살 때 천연두로 사망하여 익릉에 묻혔다. 명릉에는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가 나란히 묻혔고, 세 번째 왕비 인원황후 무덤은 약간 위쪽에 위치해있다. 명릉은 매표소와 가깝고 능의 규모도 가장 크다.
장희빈 묘는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가 묻힌 창릉 가는 길목에 있다. 기와 담장을 둘렀지만 묘비와 봉분, 곡장과 석물 등이 초라하다. 장희빈만큼 부침이 심한 궁중 여인도 드물다. 그녀가 낳은 아들의 원자 책봉을 둘러싸고 반대파 서인들을 처벌한 기사환국(1689년)의 피바람으로 인현왕후는 폐위되어 친정으로 쫓겨난다. 장희빈이 국모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숙종의 사랑은 최숙빈에게 기울면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년 뒤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둘러싸고 남인들을 몰아낸 갑술환국(1694년)으로 인현왕후는 왕비가 되어 다시 돌아오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된다. 인현왕후를 향한 저주의 굿판을 벌이다 사약을 받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경기도 광주군 옥포면 문형리에 묻혔다. 아들 경종이 즉위하면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됐다. 323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시절 사색당파를 방불케 하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파당 정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장희빈 묘를 서오릉 경내로 옮긴 것은 1969년 6월이다. 도시 계획상 이장이 불가피해졌다고 한다. 인현왕후와의 나쁜 감정을 고려하여 명릉과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묻고 대빈묘(大嬪墓)라 이름 붙였다. 시대가 변하면 관점도 달라진다. 한때 인터넷 한 카페에서 ‘장희빈 묘에 가 학춤을 추면 희빈 언니의 기를 받아 짝이 생긴다’는 글이 뜨면서 호기심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물불 안 가리고 치열하게 사랑과 지위를 쟁취한 장희빈에게서 짧지만 굵게 산 열정과 도전정신을 느끼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