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입춘대길을 쓰며

입춘대길을 쓰며

by 권영상 작가 2017.02.09

입춘 아침의 일입니다. 대문에 춘련을 써 붙이기 위해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났지요. 종이를 마침맞게 잘라놓고, 지난해에 쓰고 올려둔 책장 위의 벼루와 먹을 내렸지요. 종지에 물을 조금 떠놓고 앉아 벼루 뚜껑을 열었습니다. 근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벼루 뚜껑이 꼼짝을 안 합니다. 딱 달라붙었네요. 손바닥 턱으로 세게 힘을 주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입춘에 한 번 쓰고 말았으니 먹물에 달라붙은 모양입니다. 할 수 없이 욕조에 벼루를 넣고 더운물로도 적셔 보고, 찬물로도 끼얹어 봅니다. 그래도 여전합니다.
“그러다 깨 먹겠네. 오늘 못 쓰면 내일 쓰지.”
아내가 바장대는 내게 기어코 한 마디 합니다. 아내 말대로 나는 벼루를 욕조에 두고 방에 들어왔네요. 벼루를 깰까 봐 아내가 안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지금 저 벼루는 아내가 처녀 시절 내게 준 선물입니다. 그러고 보니 40년쯤 되는 나이를 가지고 있네요.
아내와 사귀기 시작한 지 한 5년쯤 될 때입니다. 아내는 결혼을 하자는 내 말에 통 대답을 하지 않았지요.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하는데 나만 이러다 결혼을 못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지요. 자꾸 재촉하는 대신 어느 날, 금반지 하나를 책 속에 끼워 우편으로 보냈지요.
그때 아내는 강원도 깊은 산속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조그마한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읍내에서 시오 리 험한 길을 걸어가면 강이 나왔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야 하는 오지 아닌 오지에 아내의 학교가 있었지요.
이른 봄이면 산수유 꽃이 자옥하게 피는 조그마한 산마을학교엔 선생님이 세 분, 아이들이 쉰 명쯤 되었지요. 아내는 그 학교에서 풍금과 기타로 노래지도를 했고, 밤이면 동네 아이들과 별 공부를 하며 오지 생활을 견뎠지요.
금반지를 보내고 한 달이 지났을 때입니다. 아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나도 잘 아는 아내의 친구가 결혼을 하는 곳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거기에서 아내를 만났지요. 예식이 끝난 뒤 아내가 가져온 가방을 내게 건넸습니다. 그 안에서 큼직한 돌벼루가 나왔습니다. 학교에 문방사우를 파는 이가 왔는데 그분한테 샀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내는 그 무거운 돌벼루를 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예식이 있는 먼 원주까지 왔던 거지요.
어떻든지 그때의 벼루는 내게 있어 희망이었지요. 긴 기다림 뒤에 반드시 그것이 이루어질 거라는 예감이었고, 봄이었던 셈이지요. 당장 결혼은 할 수 없지만, 어느 때가 되면 그렇게 되리라는 봄 같은 예감 말입니다. 그 후, 2년이 지난 뒤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결혼을 했지요. 오랫동안 글을 써오며 동료들의 신간을 받을 때면 이 벼루에 먹을 갈아 고맙다는 답장을 해주었고, 입춘이면 춘련을 써 대문에 붙여왔지요.
나는 다시 욕조에 둔 벼루를 보러 갔습니다. 다행히 뚜껑이 떨꺽 열립니다. 방으로 벼루를 옮겨와 먹을 갈고 붓을 들어 ‘立春大吉 建陽多慶’을 썼습니다. 대문에 춘련을 붙이고 물러나 그 글귀를 헤아려 봅니다. 머지않아 다가올 봄과 우리가 소망하던 것들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