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하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하기 때문에

by 한희철 목사 2017.01.18

여러 해 전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한 교회의 초청을 받아 독일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일정을 마친 뒤 초청한 교회 담임목사의 배려로 사흘간 독일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행 중 일부러 들렀던 곳이 부헨발트였습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32개국에서 끌려온 250,000명이 수용되었고, 강제 노동이나 기아, 처형 등으로 65,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곳이었습니다. 부헨발트 수용소는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듯 깊은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밧줄에 묶인 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 진입로는 자동차로 달려도 한참이나 걸렸는데, 길의 이름도 ‘피의 거리’였습니다.
그날 부헨발트를 돌아보며 참으로 인상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수용소의 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습니다. 경계가 까마득하게 보이는 넓은 터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모두 수용소의 터였습니다. 남아 있는 전시물은 숨을 막히게 했습니다. 수많은 기록과 사진, 유대인들이 신었던 신발과 안경들, 그중에는 두세 살 아이가 신었겠다 싶은 작은 운동화 한 켤레도 있어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하지만 부헨발트를 둘러보며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거나 가리지 않는 독일의 태도였습니다. 정말로 많은 각지의 학생들과 어른들이 그곳을 찾아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돌아보며, 교실에 모여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놀라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법의 심판을 피한 멩겔레의 유골이 상파울루대 법의학 수업에 학습 자료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멩겔레는 유대인 수천 명을 생체실험하고 가스실로 보내 ‘죽음의 천사’라고 불렸던 독일인 의사입니다.
멩겔레는 전범재판을 피해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들을 전전해 행방이 묘연했는데, 1985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신으로 발굴이 됐습니다. 시신 발굴단은 유골을 분석해 멩겔레의 얼굴과 일치한다고 판단을 했고, 당시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상파울루대 법의학 학과장은 정부 당국으로부터 멩겔레의 유골을 수업에 써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 시절 독일 강제수용소에 수용됐던 한 할머니는 멩겔레의 명령으로 뜨거운 물과 얼음물에 옷을 벗고 들어가야 했던 끔찍한 일을 회고했습니다. 상파울루대 한 역사학과 교수는 멩겔레의 유골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과학을 넘어 역사, 윤리학까지 배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학생들은 뛰어난 의사, 과학자들이 어떻게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민족을 탄압하는 데 그들의 지식을 악용했는지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의 말이 숙연하게 다가옵니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범한 만행을 꽁꽁 숨기는 대신 고통스러울 만큼 들춰내고 반성하는 것은,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