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내 마음의 브레이크

내 마음의 브레이크

by 권영상 작가 2016.12.15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본다. 달력이 10월에 멈추어 있다. 내 책상 위의 탁상달력은 물론 12월이다. 거기에 메모하고, 그 메모에 맞추어 일상을 살아온 건 맞다. 그렇다고 해도 10월을 저기 벽에 혼자 남겨두고 나만 정신없이 달려 여기 12월까지 왔다.
10월은 거기에서 허겁지겁 살아가는 나를 줄곧 지켜보았을 테다. 나는 이제 아무 소용없어진 두 장의 달력을 떼어내려고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달력만이 아니다. 아직도 10월에 머물러 있는 것이 또 있다. 음성 함박산에서 따온 으름이 창가에 걸려 있다.
“집에 걸어두고 오래오래 시월을 보라구.”
그때 함께 간 친구가 으름덩굴에서 딴 으름을 내게 건네며 그랬다. 날마다 시간에 쫓겨 우리가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것들을 외면하고 산다는 걸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나는 가끔 창가에 걸어둔 으름 열매를 보며 살았다. 그때 그 10월의 함박산. 산골짜기 저수지 물에 어리던 구름이며 바람이며 하늘을 보자, 우리는 양말을 벗고 물가에 들어섰다. 깨끗한 모래로 두꺼비집을 짓고 허물고, 잔잔한 저수지 물에 물수제비를 떴다. 잔뜩 허리를 숙여 수면을 향해 돌을 던질 때 참방 참방 물수제비를 뜨며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행복했다. 조금치라도 더 날아가면 아이들처럼 두 팔을 올려 환호했고, 손뼉을 쳤고, 얼싸안고 껑충거렸다. 그날의 그 사소한 기억이 어쩌면 앞으로 달려만 가는 내 욕망과 본능에 대한 브레이크였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집에서 가까운 산엘 간다.
산이 좋아서도 가지만 산은 다급하게 일을 저지르는 나를 제어하는 브레이크다. 무슨 일을 내기 전, 나는 먼저 산에 올라 산에 묻는다. 언제나 질문을 가지고 산에 오르면 산은 그 길의 마지막 지점에서 답을 들려주었다. 그 대답은 주로 이들이 만들어 주었다.
이슬비에 허리가 활처럼 휘는 강아지풀, 발길에 밟히는 왕바랭이, 파란 달개비꽃, 잘 익은 버찌, 지상을 울리며 갓 떨어지던 상수리 열매, 청설모가 까먹다 둔 잣송이에서 빠져나온 잣 하나, 슬며시 오솔길을 건너는 풀뱀이거나 볼볼거리며 이사를 하는 개미들이거나. 이들이 내 질문의 답을 가르쳐 주면서 저들 곁에 잠시 잠시 나를 머물게 했다.
나를 머물게 하는 것은 승용차의 브레이크가 아니다. 종교도 아니고 빛나는 이념도 아니다. 실은 작고 사소해 보이는 풀꽃이거나 개미거나 우연히 집어 드는 버찌 열매이다. 떼어놓은 발을 막 내려놓으려 할 때 미처 보지 못한 발밑의 풀꽃을 안 밟으려 내 몸이 조금 기우뚱하는 순간, 그런 순간이 질주 본능의 나를 붙잡는다.
나는 아무 소용도 없어진 달력을 떼어내려던 손을 거두어들인다. 어쩌면 10월에서 멈춘 달력도 나를 제어해주던 나 모르는 소중한 기억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소금쟁이 꽁지를 잡으려다 놓친, 손끝에 남는 그 서운한 여운이라든지, 내 마음이 울적할 때 라디오에서 마침 흘러나와주던 내 마음에 꼭 맞는 그 노래에 대한 경이로움이라든지, 그 무언가가 10월의 달력에 아련히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러저러하면서 또 한 해가 다 가고 있다. 나를 위해 잠시 잠시 나를 붙잡아준 많은 것들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