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그대가 있기에 나는 존재한다.

그대가 있기에 나는 존재한다.

by 정운 스님 2016.11.29

불교는 창조설이 없다. 굳이 여타 종교의 창조설과 맞먹는 불교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연기설(緣起說)이다. 아마 독자들은 이런 말에 왠지 딱딱하고, 거리감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한 원리이다. 사회적인 현상으로 말한다면, 바로 ‘나비효과’와 같은 원리이다. 이 말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가 처음으로 발표한 이론으로 후에 카오스(Chaos) 이론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나비효과가 처음에는 과학이론에서 발전했으나 점차 경제학과 일반 사회학 등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나비효과의 한 예로, 1930년대의 대공황이 미국의 어느 시골 은행의 부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몇 달 후에는 미국 전역에 경제가 악화되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 이론과 같은 원리라고 드러나면서 1900년대 초부터 서양의 지성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연기설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된다.’는 이론이다. 이 세상의 자연이든 사회 현상이든 사람 간의 관계 등 그 어떤 것이든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하나가 잘되면 도미노 현상처럼 연이어 잘되고, 하나가 잘 못되면 연이어 잘 못된다. 그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한 그루는 키가 크고, 무성한 아름드리나무인 반면 옆에 있는 나무는 키도 작고 매우 왜소한 나무였다. 그런데 작은 나무는 늘 불만이 가득했다. 바로 옆의 큰 나무 때문에 자신은 햇빛도 제대로 못 받고, 비가 내려도 옆의 큰 나무가 물을 다 빨아들여 자양분을 다 뺏긴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작은 나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저 큰 나무 때문에 나는 늘 이 모양 이 꼴이다. 저 큰 나무만 없어진다면 나도 저렇게 무성한 나무처럼 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저 나무를 없앨 수 있을까?’
이렇게 고민하던 차에 나무꾼이 지나갔다. 작은 나무는 나무꾼에게 큰 나무를 도끼로 찍어 가져가 달라고 부탁했다. 큰 나무가 나무꾼에 의해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작은 나무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런데 얼마 후 태풍에 작은 나무도 쓰러지고 말았다. 바람막이 되어주고, 뜨거운 햇볕을 막아줄 든든한 보호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은 나무는 큰 나무를 의지해 사는 것이건만 그 고마움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대학교에 입학한 대학생은 자신이 똑똑해서 학교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부모를 비롯해 주위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또 크고 작은 회사도 사장이 있기 때문에 직원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요, 직원이 있기 때문에 사장은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서로서로 연결된 속에서 굴러가고 있다. 그러니 어찌 자신만 잘살면 된다고 자만을 부려야겠는가? 가정에서건, 사회에서건 상대방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것만 잊지 않는다면 행복한 가정, 평화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