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깊은 유혹으로의 초대
가을, 깊은 유혹으로의 초대
by 김재은 행복플랫폼 대표 2016.11.24
아파트 뒤뜰 몇 그루 되지 않은 나무들이 가을색으로 곱게 물들었다가 이내 낙엽이 되어 떨구었다. 평소에 별로 눈이 가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는데 이토록 예쁜 치장을 하고 나타나다니. 어쩌면 관심 좀 가져달라고 떼를 쓰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색깔에 관계없이 늘 거기에서 여여하게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다만 나의 무심함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유혹(誘惑)의 안테나가 제 기능을 못 한 탓이겠지.
바야흐로 가을색의 유혹이 끝나가는 시절이다. 왜 이제야 중년 사내는 유혹을 꺼내 들었을까. 무엇보다 가을의 유혹을 즐겼을 많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어서이다.
하나 더, 유혹은 금기어가 아니라 권장어임을 만방에 고하고 싶기도 하다. 우선 유혹의 저편에 있는 말, 불혹(不惑)을 꺼내온다. 공자께서는 나이 마흔을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는 나이, 즉 불혹이라 했다.
어라, 공자도 미혹에 빠지지 말라 했지, 유혹에 빠지지 말라 한 것이 아니었네. 그렇다고 해서 공자가 유혹을 권장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천하를 주유하며 진리를 전한 분이니 굳이 이야기한다면 유혹의 삶을 살았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만그만한 삶을 살아간다. 혹자는 그것을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이라 하고 누군가는 타성에 젖은 삶이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재미없이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평행선 같은 일상의 상투적 삶에서 방향을 아주 조금만 틀어도 전혀 다른 삶이 새롭게 다가온다. 호기심 하나, 작은 감성 조각 한쪽에만 깨어있어도 삶의 다른 느낌이 솟아난다.
가을색에 마음이 끌리고, 윤도현의 ‘가을우체국 앞에서’ 노래에 귀에 기울이고, 그리운 사람에게 손편지 한 줄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떠나간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들꽃이 말라가는 가을 들길을 걷거나 가을 숲으로 산책을 나서도 좋을 것이다. 무엇하나 유혹이 아닌 게 없다.
그러고 보니 공자께서 말씀하신 불혹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기꺼이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체면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면 어찌 제대로 된 중심이 있는 삶이라 할 것인가. 정리하면 유혹을 경계함이 불혹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의 더듬이를 세우는 것이 불혹인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유혹은 게으름, 타성, 무관심의 반대쪽에 있다고.
유혹은 사랑이고 관심이자 응원이며, 이해이고 배려이며 누군가(무엇인가)에게 마음을 내어줌이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삶에 관심을 가지고, 사소한 일상에 깨어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불혹의 세계에 있겠다고 유혹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저만치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그 사람이야말로 불혹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아닐는지.
이렇듯 세상은 온통 유혹투성이이다. 떨어지는 은행잎 하나에도 시선을 던지고, 누군가의 아픔에 속 깊은 마음을 내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는 것, 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
작은 용기를 내어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유혹의 세계로 뛰어들어보자. 그 대가가 우후죽순처럼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다. 소중한 내 삶을 감기(감사와 기쁨)로 채우고 싶다면 바로 그 길을 선택하라. 다만 유혹을 권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비밀로 해 주시길...
바야흐로 가을색의 유혹이 끝나가는 시절이다. 왜 이제야 중년 사내는 유혹을 꺼내 들었을까. 무엇보다 가을의 유혹을 즐겼을 많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어서이다.
하나 더, 유혹은 금기어가 아니라 권장어임을 만방에 고하고 싶기도 하다. 우선 유혹의 저편에 있는 말, 불혹(不惑)을 꺼내온다. 공자께서는 나이 마흔을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는 나이, 즉 불혹이라 했다.
어라, 공자도 미혹에 빠지지 말라 했지, 유혹에 빠지지 말라 한 것이 아니었네. 그렇다고 해서 공자가 유혹을 권장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천하를 주유하며 진리를 전한 분이니 굳이 이야기한다면 유혹의 삶을 살았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만그만한 삶을 살아간다. 혹자는 그것을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이라 하고 누군가는 타성에 젖은 삶이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재미없이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평행선 같은 일상의 상투적 삶에서 방향을 아주 조금만 틀어도 전혀 다른 삶이 새롭게 다가온다. 호기심 하나, 작은 감성 조각 한쪽에만 깨어있어도 삶의 다른 느낌이 솟아난다.
가을색에 마음이 끌리고, 윤도현의 ‘가을우체국 앞에서’ 노래에 귀에 기울이고, 그리운 사람에게 손편지 한 줄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떠나간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들꽃이 말라가는 가을 들길을 걷거나 가을 숲으로 산책을 나서도 좋을 것이다. 무엇하나 유혹이 아닌 게 없다.
그러고 보니 공자께서 말씀하신 불혹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기꺼이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체면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면 어찌 제대로 된 중심이 있는 삶이라 할 것인가. 정리하면 유혹을 경계함이 불혹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의 더듬이를 세우는 것이 불혹인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유혹은 게으름, 타성, 무관심의 반대쪽에 있다고.
유혹은 사랑이고 관심이자 응원이며, 이해이고 배려이며 누군가(무엇인가)에게 마음을 내어줌이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삶에 관심을 가지고, 사소한 일상에 깨어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불혹의 세계에 있겠다고 유혹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저만치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그 사람이야말로 불혹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아닐는지.
이렇듯 세상은 온통 유혹투성이이다. 떨어지는 은행잎 하나에도 시선을 던지고, 누군가의 아픔에 속 깊은 마음을 내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는 것, 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
작은 용기를 내어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유혹의 세계로 뛰어들어보자. 그 대가가 우후죽순처럼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다. 소중한 내 삶을 감기(감사와 기쁨)로 채우고 싶다면 바로 그 길을 선택하라. 다만 유혹을 권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비밀로 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