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 시험일이 불과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수능은 예비고사가 발전된 시험방식인데, 예비고사를 치르던 그날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향 집은 시내에서 십여 리 떨어진, 시내버스라곤 두어 시간에 한 대꼴로 다니는 시골이었다. 예비고사가 있던 그날, 나는 수험장 도착 시간에 맞추어 버스 정류장에 나갔다. 어찌 된 일인지 버스가 와야 할 시각인데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하며 10분 20분을 기다려도 버스는 끝내 오지 않았다.
걸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걸어간대도 제시간에 대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마을 뒤쪽을 향해 달렸다. 거긴 관광지 경포대해수욕장이 있다. 관광지라 겨울이어도 마이크로버스(지금의 승합차)가 가끔 있었다. 달려가면 20여 분 거리.
나는 있는 힘껏 추운 새벽 호숫길을 달렸다. 시험을 못 칠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지금처럼 경찰이 호들갑을 떨며 태워줄 곳도 아닌 시골이었으니 내 몸에 의지해 뛸 수밖에 없었다. 땀 범벅으로 달려가 간신히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아뿔싸! 책가방 끈이 떨어지며 가방 속 도시락과 책이 쏟아져 나왔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걸 주워 담아 빈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호수 너머 동쪽에서 해가 뜨려는지 희붐하게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내 머리에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필 가방끈이 떨어지다니! 그것도 오늘.’
정신없이 달렸으니 가방끈이야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긴 해도 ‘떨어졌다’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이상했다. 늘 오던 버스가 하필 오늘 오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것도 아닌 가방끈이 떨어진 것도 의심스러웠다. 막상 고사장에 들어가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만 나는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무언가 떨어졌다는 일, 고3인 나는 불안했다. 예비고사 점수로 대학을 선택하던 때라 1점이라도 떨어진다는 건 분명 불길한 일이었다.
예전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도 나와 생각이 같았다. 그들은 아예 ‘떨어진다’는 말마저도 꺼렸다. 서거정이 쓴 ‘태평한화골계전’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어떤 서생이 과거를 보러 영남에서 올라왔는데 먼저 온 서생들이 어디서 자고 왔느냐고 묻자, 낙생역에서 자고 왔다고 했다. 그러자 상서롭지 못한 말 ‘낙’ 자를 썼다고 해 내쫓았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어떤 서생이 과거 시험장에서 시험지를 받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다가 그만 시험지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서생이 떨어뜨렸다는 말 대신 ‘당신의 시험지가 섰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서생은 그게 무슨 소리인 줄 몰라 마침내 시험지를 잃어버렸다 한다.
오늘 서거정을 글을 읽는 중에 문득 그 옛날의 예비고사가 생각났다. 가방끈이 떨어지는 것이 성적이 떨어지거나 낙방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테다. 하지만 각별히 조심스러운 날에는 그런 말조차 각별히 쓰는 게 옳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