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옛사람들의 웅숭깊은 밥사발

옛사람들의 웅숭깊은 밥사발

by 권영상 작가 2016.11.03

지난 일요일, 먼 집안의 혼사가 있었다. 혼례식장이 가까이도 아닌 횡성이었다. 일이 바쁘다는 아내를 데리고 나섰다. 그때부터 아내는 마음이 불편했다. ‘혼자 슬쩍 다녀오지 바쁜 저를 꼭 데려가야 하느냐’였다. 끝내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그 문제를 다시 꺼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일요일 오후, 가을철 영동고속도로 상행길 정체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온몸을 뒤척이던 아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건 자명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불만을 너그러이 받아주지 못했다. 먼 집안이어도 집안 혼사에 가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니냐며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덩치도 크니 그릇도 큰 줄 알았는데 사람을 잘못 보고 살았다며 아내가 한숨 섞인 넋두리를 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내 방에 불을 켜고 앉았다. 이왕 동행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좋은 마음으로 와 줄 것이지 꼭 그런 내색을 해야 하는지, 나는 속으로 아내를 탓했다. 그러는 내 눈에 문득 장조카가 준 사발 그릇 한 벌이 들어왔다. 아직 마땅히 놓을 자리가 없어 그냥 키 낮은 책장 위에 올려놓은 거다.
지난여름 고향에 들렀을 때다. 장조카가 내게 오래된 사발 그릇 한 벌을 가져가라며 내밀었다. 나는 이런 고릿적 밥그릇을 어디에 쓸 거냐며 거절했지만 조카는 기어이 그걸 내 차에 실었다. 그 밥사발과 국대접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사발 치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연한 푸른 빛이 은은하다. 근데 들여다볼수록 놀라운 건 턱없이 큰 그릇의 크기다. 지금 누가 이 밥그릇에 밥을 가득 담아준다면 나는 그 밥그릇의 기세에 꺾여 밥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 크기로 말하자면 지금의 젊은이 서넛은 먹고도 남을 만하다. 무엇보다 그 웅숭깊은 깊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옛사람들은 날마다 이렇게 큰 밥그릇과 마주했을 테다. 이렇게 큰 밥그릇을 쥐고 설거지를 했을 테고, 이 큰 밥그릇에 맞게 한솥 넉넉히 밥을 짓고 밥을 펐을 테고, 이 밥그릇 앞에 앉아 밥그릇의 밥을 비웠을 테다. 그러느라 옛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의 마음도 사발 그릇의 웅숭깊은 크기만큼 키워갔을지 모른다.
과거엔 한 지붕 아래에서 여러 식구가 얼굴을 맞대고 살았을 테니 미운 일도 받아들이고, 눈에 걸리고, 귀에 거슬리는 일도 받아들여 삭이며 살아야 하는 큰마음이 필요했을 거다.
사람이란 밥상의 밥그릇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다. 옛사람들이 밥그릇을 키운 까닭은 밥보다 마음의 그릇을 키우라 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의 밥그릇은 그 시절에 비하면 반찬 그릇만도 못하게 작다. 밥그릇이 작아진 만큼 어쩌면 점점 나의 그릇도 작아져 온 게 아닌가 싶다. 웬만하면 참을 수 있는 남의 말쯤 참지 못한다. 웬만하면 참을 수 있는 남의 실수쯤 너그러이 보아 넘기지 못한다. 남의 실책쯤 모른 척 덮어주기보다 내 옹졸한 그릇의 크기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책상에 내려놓은 밥사발을 바라보다 그에게 적당한 자리를 잡아주기로 했다. 컴퓨터 옆자리 마우스를 집는 그 가까이에 두기로 했다. 날마다 밥사발의 이 웅숭깊은 크기를 들여다보며 아내에게 그릇 작다는 소리만은 좀 면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