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진다는 것에 대하여

진다는 것에 대하여

by 한희철 목사 2016.10.26

우리말 ‘지다’에는 많은 뜻이 있습니다. 막 이 글을 쓰면서 사전의 도움을 받으니 ‘지다’의 뜻과 용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동사로 쓰이는 경우입니다. 젖이 불어 저절로 나오다는 뜻으로 ‘젖이 ~’, 어떤 현상이나 상태가 이루어지다는 뜻으로 ‘얼룩이 ∼’, 서로 좋지 않은 관계가 된다는 뜻으로 ‘원수가 ∼’, 보통보다 특징이 두드러지게 생기다는 뜻으로 ‘모가 ∼’, 해나 달이 서쪽으로 넘어가다, 꽃·잎 따위가 시들어 떨어지다, 거죽에 묻어 있거나 붙어 있던 것이 닦이거나 없어지다, 태아가 배 속에서 죽다, 목숨이 끊어지다, 이슬 따위가 사라져 없어지다, 싸움·겨루기 따위에서 상대를 이기지 못하다, 민사 재판에서 패소하다, 어떤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거나 양보하다 등으로 쓰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다’는 타동사로도 쓰입니다. ‘등지다’의 준말, 지게나 물건을 등에 얹다, 남에게 빚을 얻거나 하여 갚아야 할 의무를 지다, 신세나 은혜를 입다, 어떤 책임이나 임무를 맡다 등의 뜻을 갖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어서 ‘지다’는 어미 ‘아’나 ‘어’ 뒤에 붙어 사물이 어떻게 되어 감을 나타내는 보조동사(좁아∼)로 쓰이기도 하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뜻을 나타내는 예스러운 표현인 보조형용사(보고 지고)로 쓰이기도 하고, 명사 뒤에 붙어서 그리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기름∼. 값∼)로도 쓰입니다. 짧은 단어 하나에 이렇게도 많은 뜻과 쓰임새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말이 아름답고 의미가 깊고 넓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나무들이 붉게 물들고 더러더러 성급하게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보자니 ‘지다’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지다’는 말을 생각하다 보니 그 말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 중 ‘떨어지다’와 ‘상대를 이기지 못하다’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싶기도 합니다. 곱게 물든 나뭇잎이 지듯 기꺼이 (싸움에서) 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 싶은 엉뚱한 생각입니다.
<희랍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한 때 여러 수도원을 기행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수도자를 만났는데, 수도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물었습니다. “수도자님은 아직도 사탄과 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너무 힘들어 보이십니다.” “웬걸요, 사탄과의 싸움은 벌써 끝났습니다.” “아니 그러면 누구와 싸우기에 그렇게 지쳐 있습니까?” “하느님과 싸우지요.” 하느님과 싸운다는 말에 깜짝 놀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다시 물었습니다. “하느님과 싸운다고요? 설마 하느님을 이기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때 수도자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하느님께 지려고 싸웁니다. 그런데요, 하느님께 지는 것이 이리도 어렵습니다.”
그것이 나와의 싸움이든 하늘의 뜻과의 싸움이든 기꺼이 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순명이며 사랑 아닐까요. 때를 예감한 나뭇잎이 대지의 품에 안기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세상은 이기는 자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기꺼이 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