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양호가 뉴욕서 양호하게 자랐으면

양호가 뉴욕서 양호하게 자랐으면

by 이규섭 시인 2016.08.26

시대 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시대에 적응하기 어렵다. 음악가 겸 사진가 겸 저술가 한대수가 그렇다. 우리 나이로 칠순에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뉴욕으로 떠났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19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 LP판 표지다. 엄지와 검지로 양 볼을 누른 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흑백 사진은 혐오감을 줄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당시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을 히피 정신과 인도 음악, 한국의 정서를 녹여냈다고 평가했지만 대중들에게는 거칠고 생소했다.
이듬해 나온 2집 앨범 ‘고무신’ 표지도 독특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벽돌담 위 철조망에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엇박자로 걸려있는 흑백사진이다.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희망가’ 등이 담긴 1·2집이 체제전복 음악이라며 금지되는 수난을 겪고 음악적 망명을 강요받았다.
그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할아버지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핵물리학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다. 일곱 살 때 아버지는 미국에서 행방불명됐다. 10여 년 만에 발견된 아버지는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어머니가 재가한 뒤 뉴욕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수의학을 전공하라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사진 학교에 다녔다. 그 무렵 뉴욕에서 히피 문화와 로큰롤을 접했다. 60년대 말 장발과 청바지에 기타를 들고 서울에 나타났다. 쎄시봉에서 송창식·윤형주가 감미로운 팝송을 부르고 조영남이 톰 존스의 노래를 성악조로 부를 때 그는 자신이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행복의 나라’를 불렀다.
행복을 꿈꾸는 한대수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디자이너였던 아내와 이혼하고 러시아계 미국인 여인과 재혼하여 2004년 한국에 왔다. 가수와 집필, 사진작가와 방송 DJ로 활동하며 정착하는가 싶더니 12년 만에 뉴욕으로 떠났다. 환갑 나이에 스물두 살 어린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양호’의 교육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한 신문의 고정 칼럼을 통해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을 위해 떠나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초등학교에 딸이 입학하니 또래 아이들이 한글을 읽고 써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선행학습의 결과다. 주입식 교육도 모자라 아이들을 과외로 내몬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 사회의 화합, 부모님의 사랑, 친구들과 나누는 우정을 배워야 할 시기에, 머리를 싸매고 외우고 또 외우기만 한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딸 양호에게 이런 고문을 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심정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공부시간이 가장 길고 사교육도 가장 많이 받는다. 그런데 학업 성취도는 꼴찌다. 창의적 사고로 새로운 길을 여는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고, 청소년의 자살률이 높은 것도 우리 교육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그는 월세가 평균 250만 원 드는 뉴욕에서 살아가기 어렵겠지만 노숙자가 될 각오까지 한다니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과 용기가 대단하다. 뉴욕에 정착한 양호는 아버지 한대수가 ‘양호하게 자라서 양호하게 살고 양호한 일꾼이 돼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듯이 밝고 맑고 구김살 없이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