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달팽이는 느리지만 뒤로 가지 않는다

달팽이는 느리지만 뒤로 가지 않는다

by 정운 스님 2016.08.09

몇 년 전에 공영방송에서 무슨(?) 캠페인으로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을 소개한 적이 있다. 2~3분의 짧은 내용이었지만, 마음 한 쪽에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김득신이 10세에 한자를 겨우 익혔고, 같은 책은 수만 번 읽었으며, 과거도 59세에 합격했다는 내용인데 수년이 되었어도 기억이 또렷하다.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겠다 싶어서 기억해 두었는데, 실은 학생들보다 필자에게 필요한 교훈이다.
학생들에게 강의하지만, 필자도 공부를 위해 늘 책과 가까이해야 한다. 솔직히 표현해 공부에 타고나게 좋은 편이 아니다 보니, 공부에 진전이 없고 늘 그 자리에 맴돈다. 이런 때, 한 번쯤 새길만 한 분이어서 다시 자료를 찾아보았다.
김득신은 할아버지가 진주대첩의 명장 진주목사 김시민이고, 아버지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분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심하게 아둔하였고, 기억력이 나빠 보통 사람 수준보다 아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의 설득과 독려로 꾸준히 공부해 20세에 처음으로 글을 지었고, 39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59세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잠깐 머물렀다. 이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해 시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 한번 읽고 책장에 꽂아두어 어디에 둔 지도 모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김득신은 반복해 읽은 것이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김득신은 자신의 문집 <백곡집> '독수기(讀數記')에 자신이 1만 번 이상 읽은 책 목록 36권을 소개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은 1억1만 3000번을 읽었다고 한다[억만이란 지금으로 10만 번 정도 됨]. 그래서 김득신은 억만 번 읽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재 이름도 억만재(億萬齎)로 지었다.
<노자전> 등 7편은 2만 번 읽었고, <제책(齊策)> 등 다섯 편은 1만 8,000번을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득신이 만독하지 않은 책은 책 제목조차 기재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보통 사람보다 아둔한 처지에 조선의 문장가로 알려져 있으니, 노력형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를 접한 이식[당대 최고의 한문 대가]은 김득신에게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김득신의 묘지가 충북 증평군에 있는데, 부근에 그를 위한 시비가 제막되어 있고, 동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앞으로 김득신 문학관까지 건립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종종 ‘전 세기의 천재’이니, ‘20세기 천재이니’ 하는 사람들이 거론된다. 물론 세상은 다양한 인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천재를 접하면 그저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멸감까지 느낀다. 필자야 중년의 나이이지만, 학생들이 자신을 천재와 비교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지 않아도 학생들이 성적으로 주눅 들어 있는데, 자굴심이나 비하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링컨은 “나는 천천히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로 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타고난 천재여서 한순간에 이룩하는 사람도 있지만, 피와 땀의 과정 과정에서 얻는 성공도 인생의 큰 보람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