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황소처럼 껌벅거리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황소처럼 껌벅거리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by 김재은 행복플랫폼 대표 2016.08.04

지난 주말 온 가족이 아버지 생신으로 울산 형 집에 모였다. 이번엔 내가 조금 일찍 내려가 고향의 부모님을 모시고 울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제 80대 중반을 넘어선 부모님은 거동이 불편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큰 지병이 없이 이 정도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모시고 이동을 하다가 순간 백미러로 아버지의 눈과 마주쳤다. 피곤하실 텐데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계신다. 그러고 보니 차에 탈 때마다 아버지의 눈은 언제나 떠 있었다. 한 번도 졸거나 눈을 감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난 운전을 제외하곤 차에 타거나 어디에 앉아 있을 때 툭하면 졸거나 잠들어버리는데. 궁금했다. 아버지 당신 스스로도 이에 관해 설명을 하지 못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런데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황소였다. 한 집안의 든든한 지킴이이자 가보였던 황소의 눈이 생각났다. 늘 눈을 껌벅거리며 주인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해 온 소중한 존재가 바로 황소였다. 아버지의 눈이 바로 황소의 눈을 닮았다는 생각이 왜 떠올랐을까.
평생을 농군으로 살아온 아버지였다. 황소를 닮은 눈으로 아버지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생각하며 눈을 껌벅거리고 있을까. 공부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형편에 그럴 수 없었던 지난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듯하기도 하고, 평생 노동으로 살다가 끝내 굽어버린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아픔을 다시 떠올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동생들 뒷바라지에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형보다 먼저 떠난 떵떵거리며 살았던 동생들의 삶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눈망울은 깊은 회한이 서린 듯 깊고 또 깊다. 밭을 갈 때도, 주인 따라 달구지를 끌고 장에 갈 때도, 집으로 돌아와 볏 짚죽을 먹으며 껌벅거리던 황소의 그 눈에도 회한이 서려 있었을까.
아버지는 가끔 세상에 대한 불만이나 불평을 토로하곤 한다. 그냥 참고 삭히는 거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그 회한이 안에만 있으면 독이 되고 끝내 자유스러운 삶에 제동을 거는 앙금으로 남아 있을 테니. 이런 불만 끝에는 항상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깊은 회한만큼 깊고도 큰 사랑이 아버지의 눈망울에 서려 있음을. 황소만큼 맑고 투명하지는 못해도, 거미줄이 쳐 있는 듯 안개가 서린 듯 희미한 그곳에 자식들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청포도처럼 알알이 박혀 있음을 알고 있다. 진한 땀방울로 얼룩진 지나온 삶들은 그 무엇보다 아버지의 눈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으리라. 긴 세월, 깊은 삶을 살아온 아버지도 언제인가 지구별 소풍을 마칠 것이다. 그 소풍이 당신이 생각한 만큼 즐겁고 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삶은 한없이 깊었고, 맑았고, 진한 사랑이 아침이슬처럼 영롱하게 매달려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가난했지만 잘 사셨고, 그 큰 사랑에 힘입어 자식들의 우애를 얻었다. 무엇보다 90년 가까운 세월, 수많은 곡절과 시련을 이겨내며 뚜벅뚜벅 걸어온 당신이야말로 인생 무대의 눈부신 주인공이었다.
오늘도 잘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늘 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듣지만, 잔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으니 그래서 즐겁고 편안할지도 모른다.
차에 타면 늘 황소처럼 껌벅거리는 눈을 가진 아버지가 그립다. 어제 뵙고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