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 ‘3각(閣)’의 변신
요정 ‘3각(閣)’의 변신
by 이규섭 시인 2016.07.29
폭염주의보 속 지난주 초 3일간 강사 보수교육을 받았다. “삼복염천에 무슨 교육이람…” 속으로 투덜거리며 길을 나섰다. 교육의 취지가 좋아도 피교육자 입장에선 피곤하고 귀찮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교육장소 찾아가는 길을 확인하니 인왕산 자락 도심이다. 경복궁역에서 버스로 갈아탄 뒤 내려 접어든 마을은 높은 담장에 정원수가 가지런한 부자 동네다.
가파른 언덕길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도착하니 날렵한 청기와 지붕의 연수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 중견 그룹의 연수원이다. 자체 교육뿐 아니라 외부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의 교육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3층 건물로 아늑하고 품위 있게 꾸며 놓았다. 대강당 중강당 명칭은 인재룸, 창의룸이다. 인재가 되어 창의성을 발휘하러 온 느낌이 든다. 휴게실과 갤러리가 단아하고 힐링 공간인 사색공원도 조성해 놓았다. 하늘공원 옥상에 오르니 남산N타워가 마주 보인다.
연수원 장소가 예사롭지 않아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요정 ‘청운각(淸雲閣)’ 자리라고 귀띔해 준다. 인터넷 각종 자료를 검색해보니 일제강점기 때 미쓰이 물산 한국지사장 사택이었다. 해방 후 이시영 부통령 관사로 쓰이다가 조차임 여사에게 넘어가면서 요정으로 바뀌었다. 청운각은 1950∼1970년대 대원각, 삼청각과 함께 서울의 요정 ‘3각(閣)’으로 명성을 떨쳤다. 자유당 때부터 야망 있는 실력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요정정치의 산실 구실을 했다. 3대 요정 중 외교 장소로 활용됐고 청운각 담판으로 불리는 1965년 한일회담이 열린 곳이다.
‘밤의 꽃’으로 명성을 떨치다 1970년 3월 한강 변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정인숙이 데뷔한 요정도 ‘청운각’이다. 그 뒤 ‘선운각’으로 옮겨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외국 바이어와 귀빈 접대를 위해 명문대 영문학과 출신 미모의 여성들을 배치했다. 잘나가는 연예인 가운데 길거리 캐스팅된 경우도 있지만 그 시절엔 요정 캐스팅이 대세였다. 정인숙은 요정가에서 출산은 금기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았고 “내 말 한 마디면 안 되는 게 없다”고 큰소리치다가 비운을 자초했다. 청운각이 잘나가던 시절 상시인력 100여 명에, 바쁠 때는 300여 명 정도였다니 그 규모를 짐작게 한다. 신군부 등장 이후 경영난 악화로 고전을 겪다가 1982년 한 종교재단에서 인수했다가 주인이 바뀌면서 연수원으로 탈바꿈됐다.
성북동의 ‘대원각(大苑閣)’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됐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주인 김영한 여사와 시인 백석의 이루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여주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1,000억짜리 요정을 시주하게 되고 ‘길상사’로 모습이 바뀌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때 지어진 성북동의 삼청각은 권력층과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서 영업 부진을 겪다 서울시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현재 세종문화회관이 음식점으로 위탁 운영하고 있다. 요정은 90년대 초까지 ‘막후정치’와 ‘기생관광’이란 부끄러운 이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궁중요리와 함께 한정식의 맥을 이어온 긍정적 측면도 있다.
가파른 언덕길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도착하니 날렵한 청기와 지붕의 연수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 중견 그룹의 연수원이다. 자체 교육뿐 아니라 외부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의 교육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3층 건물로 아늑하고 품위 있게 꾸며 놓았다. 대강당 중강당 명칭은 인재룸, 창의룸이다. 인재가 되어 창의성을 발휘하러 온 느낌이 든다. 휴게실과 갤러리가 단아하고 힐링 공간인 사색공원도 조성해 놓았다. 하늘공원 옥상에 오르니 남산N타워가 마주 보인다.
연수원 장소가 예사롭지 않아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요정 ‘청운각(淸雲閣)’ 자리라고 귀띔해 준다. 인터넷 각종 자료를 검색해보니 일제강점기 때 미쓰이 물산 한국지사장 사택이었다. 해방 후 이시영 부통령 관사로 쓰이다가 조차임 여사에게 넘어가면서 요정으로 바뀌었다. 청운각은 1950∼1970년대 대원각, 삼청각과 함께 서울의 요정 ‘3각(閣)’으로 명성을 떨쳤다. 자유당 때부터 야망 있는 실력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요정정치의 산실 구실을 했다. 3대 요정 중 외교 장소로 활용됐고 청운각 담판으로 불리는 1965년 한일회담이 열린 곳이다.
‘밤의 꽃’으로 명성을 떨치다 1970년 3월 한강 변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정인숙이 데뷔한 요정도 ‘청운각’이다. 그 뒤 ‘선운각’으로 옮겨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외국 바이어와 귀빈 접대를 위해 명문대 영문학과 출신 미모의 여성들을 배치했다. 잘나가는 연예인 가운데 길거리 캐스팅된 경우도 있지만 그 시절엔 요정 캐스팅이 대세였다. 정인숙은 요정가에서 출산은 금기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았고 “내 말 한 마디면 안 되는 게 없다”고 큰소리치다가 비운을 자초했다. 청운각이 잘나가던 시절 상시인력 100여 명에, 바쁠 때는 300여 명 정도였다니 그 규모를 짐작게 한다. 신군부 등장 이후 경영난 악화로 고전을 겪다가 1982년 한 종교재단에서 인수했다가 주인이 바뀌면서 연수원으로 탈바꿈됐다.
성북동의 ‘대원각(大苑閣)’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됐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주인 김영한 여사와 시인 백석의 이루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여주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1,000억짜리 요정을 시주하게 되고 ‘길상사’로 모습이 바뀌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때 지어진 성북동의 삼청각은 권력층과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서 영업 부진을 겪다 서울시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현재 세종문화회관이 음식점으로 위탁 운영하고 있다. 요정은 90년대 초까지 ‘막후정치’와 ‘기생관광’이란 부끄러운 이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궁중요리와 함께 한정식의 맥을 이어온 긍정적 측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