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송과 해수욕
해송과 해수욕
by 강판권 교수 2016.07.25
여름은 해수욕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는 바다의 혜택을 크게 입고 있다. 그러나 바다는 희망이자 때론 재앙의 원인이기도 하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바다 때문에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매년 해수욕장에서는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 나는 해수욕을 크게 즐기지 않지만 바닷가의 해송을 좋아한다. 소나뭇과의 해송은 해수욕장에서 필요한 존재다.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파라솔 덕분에 작렬하는 태양을 피하지만, 파라솔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해송을 이용해서 태양을 피하기 때문이다.
해송은 바닷가에서 잘 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바닷가에 살아서인지 이 나무의 껍질은 검다. 그래서 해송을 '흑송' 혹은 '곰솔'이라 부른다. 곰솔의 '곰'은 '검다'를 줄인 말이다. 곰솔은 바닷바람에 견디느라 잎도 소나무보다 두텁고 거칠다. 곰솔은 내륙에서도 살지만 바닷가에서 많이 만날 수 있다. 특히 곰솔은 바다의 소금기에도 잘 견딘다. 우리나라 전국 해수욕장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곰솔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해수욕장의 곰솔은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마운 존재다. 그러나 해수욕장의 곰솔은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소중한 존재가 아니다. 곰솔은 해수욕장 주변의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도 무척 귀한 존재다. 곰솔은 해수욕장 주변의 농작물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농작물은 대부분 소금기에 노출되면 말라버린다. 곰솔은 바람에 날아오는 소금기를 막아준다.
나의 고향 창녕에도 곰솔이 살고 있다. 고향집 뒷산 가장자리에 살고 있던 곰솔은 키가 아주 컸다. 동네 사람들은 뒷산 곰솔의 가지에 그네를 만들었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그네를 타면서 서쪽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뒷산의 곰솔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어느 날 사라진 것이다. 곰솔은 잎이 거칠고 길어서 땔감이 귀하던 시절에는 아주 훌륭한 땔감이었다. 어린아이들은 곰솔의 잎을 먼저 줍느라 치열하게 경쟁했다. 곰솔 주변에는 쇠똥구리가 많았다. 여름방학 때 나는 친구들과 곰솔 근처에서 쇠똥구리를 잡아서 놀았다. 풍뎅잇과의 쇠똥구리는 소의 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쇠똥구리는 소의 똥이 적당히 마른 곳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똥의 상태를 잘 봐야만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쇠똥구리를 잡는 데 마음을 빼앗겨 소똥이 완전히 마른 곳을 손으로 뒤지다가 그만 지네에게 물려버렸다. 곰솔의 뿌리 주변의 마른 쇠똥에 지네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곰솔에 얽힌 나의 추억 중에는 지네에 물린 것 외에도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어린 시절 산자락에 살았던 나는 밤에 화장실 근처 곰솔에서 '귀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향집 화장실은 대문 밖에 있었고, 화장실은 곰솔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앉으면 눈앞에 바로 곰솔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 앞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날 뒤로 밤에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귀신이 아니라 곰솔이었다. 두려움에 떨다가 곰솔을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고향의 화장실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곰솔은 사라졌다. 그러나 곰솔에 대한 나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제주도 산천단 곰솔군락(천연기념물 제160호)이 그립다.
해송은 바닷가에서 잘 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바닷가에 살아서인지 이 나무의 껍질은 검다. 그래서 해송을 '흑송' 혹은 '곰솔'이라 부른다. 곰솔의 '곰'은 '검다'를 줄인 말이다. 곰솔은 바닷바람에 견디느라 잎도 소나무보다 두텁고 거칠다. 곰솔은 내륙에서도 살지만 바닷가에서 많이 만날 수 있다. 특히 곰솔은 바다의 소금기에도 잘 견딘다. 우리나라 전국 해수욕장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곰솔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해수욕장의 곰솔은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마운 존재다. 그러나 해수욕장의 곰솔은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소중한 존재가 아니다. 곰솔은 해수욕장 주변의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도 무척 귀한 존재다. 곰솔은 해수욕장 주변의 농작물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농작물은 대부분 소금기에 노출되면 말라버린다. 곰솔은 바람에 날아오는 소금기를 막아준다.
나의 고향 창녕에도 곰솔이 살고 있다. 고향집 뒷산 가장자리에 살고 있던 곰솔은 키가 아주 컸다. 동네 사람들은 뒷산 곰솔의 가지에 그네를 만들었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그네를 타면서 서쪽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뒷산의 곰솔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어느 날 사라진 것이다. 곰솔은 잎이 거칠고 길어서 땔감이 귀하던 시절에는 아주 훌륭한 땔감이었다. 어린아이들은 곰솔의 잎을 먼저 줍느라 치열하게 경쟁했다. 곰솔 주변에는 쇠똥구리가 많았다. 여름방학 때 나는 친구들과 곰솔 근처에서 쇠똥구리를 잡아서 놀았다. 풍뎅잇과의 쇠똥구리는 소의 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쇠똥구리는 소의 똥이 적당히 마른 곳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똥의 상태를 잘 봐야만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쇠똥구리를 잡는 데 마음을 빼앗겨 소똥이 완전히 마른 곳을 손으로 뒤지다가 그만 지네에게 물려버렸다. 곰솔의 뿌리 주변의 마른 쇠똥에 지네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곰솔에 얽힌 나의 추억 중에는 지네에 물린 것 외에도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어린 시절 산자락에 살았던 나는 밤에 화장실 근처 곰솔에서 '귀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향집 화장실은 대문 밖에 있었고, 화장실은 곰솔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앉으면 눈앞에 바로 곰솔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 앞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날 뒤로 밤에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귀신이 아니라 곰솔이었다. 두려움에 떨다가 곰솔을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고향의 화장실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곰솔은 사라졌다. 그러나 곰솔에 대한 나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제주도 산천단 곰솔군락(천연기념물 제160호)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