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티즈의 생존을 위한 울음
말티즈의 생존을 위한 울음
by 권영상 작가 2016.07.21
밤골에 내려오자, 길 건너 파란 지붕집 할머니 댁에서 강아지가 울었다. 누렁이 강아지를 분양받으신 모양이구나 했다. 저녁을 먹고, 별을 보러 나왔는데 낮에 한 번 울던 그 강아지가 다시 울었다. 햇강아지니까 밤이 무서워 저럴 테지 했다. 에미 품에 살다 혼자 떨어져 나오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외롭고 서러운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번엔 울음소리는 사뭇 길었다. 밤이 무서워 칭얼대는 울음이기보다 뭔가 절박함을 호소하는 울음이었다. 강아지는 자정이 넘도록 울었다.
오늘은 외롭겠지만, 내일이면 너도 외로움을 이겨낼 거라며 속으로 그를 위로했다. 강아지를 키워봤지만, 어미 곁을 일찍 떠나야 하는 집짐승들은 숙명처럼 외로움과 금방 친숙해진다.
새벽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3시. 강아지는 계속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가 쉬어버렸다. 울기보다 할딱대고 있었다. 그 할딱대는 숨소리가 나를 깨운 듯했다. 건너편 할머니는 저 울음을 못 듣고 주무실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귀가 좀 어둡다. 이쪽에서 집 앞을 지나가시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면 대답 대신 “내가 귀가 좀 어두워서.” 그게 인사에 대한 대답이셨다. 그러니 못 듣고 주무실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다 다시 잠들어 아침에 깨었다. 이제는 안 울겠지, 했는데 여전히 울었다. 목청은 오히려 새벽보다 좀 더 크고 거칠었다. 마당에 나가니 옆집 김형이 잠을 못 잤다며 강아지 얘기를 했다.
“마티즈라나 뭐 말티즈라나 하는 애완견이에요. 딸이 키우던 걸 맡기고 갔다네요. 그걸 마당 개집에다 매어놓았으니...”
애완견 말티즈란 말을 듣고 보니 강아지 울음소리가 내 귀에 다르게 들렸다. 나를 사랑해줘요. 나를 안아줘요. 나를 이 불결한 개집에서 구해주세요. 어서 빨리 청결한 방안으로 데려가 주세요. 아,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요. 내 말을 좀 들어주세요. 왜 내 말에 끄떡도 않지요. 사람을 탓하듯 읍소하듯 그렇게 우는 소리로 들렸다.
오늘도 강아지는 하루 내내 울었다. 십 분도 쉬지 않았다.
할머니 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최대한 감정을 누그러 가지고 어른 몇이 할머니를 찾았다. 강아지가 어디 아픈가 보네요? 식사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요? 따님이 자식처럼 잘 키우셨나 봅니다. 기껏 그렇게 말했지, 강아지 울음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말은 모두 삼갔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렇다고 개를 방안에 들여 키울 수 없잖아.” 그 말만 하셨다. 옛날 분인 할머니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돌아서며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누렁이 강아지라면 하루 이틀 저러다가 말겠지만, 상대가 애완견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저렇게 저를 안아달라는데 바쁘신 할머니가 어떻게 그걸 안고 사실까. 말티즈는 더욱 나은 환경을 위해 생존의 비명을 지르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다.
쉬지 않고 앙칼지게 울어댈 때엔 한주먹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에 숨어있는 충동성을 다독인다. 말티즈를 맡기고 간 할머니 딸이 정말이지 야속하다.
오늘은 외롭겠지만, 내일이면 너도 외로움을 이겨낼 거라며 속으로 그를 위로했다. 강아지를 키워봤지만, 어미 곁을 일찍 떠나야 하는 집짐승들은 숙명처럼 외로움과 금방 친숙해진다.
새벽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3시. 강아지는 계속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가 쉬어버렸다. 울기보다 할딱대고 있었다. 그 할딱대는 숨소리가 나를 깨운 듯했다. 건너편 할머니는 저 울음을 못 듣고 주무실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귀가 좀 어둡다. 이쪽에서 집 앞을 지나가시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면 대답 대신 “내가 귀가 좀 어두워서.” 그게 인사에 대한 대답이셨다. 그러니 못 듣고 주무실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다 다시 잠들어 아침에 깨었다. 이제는 안 울겠지, 했는데 여전히 울었다. 목청은 오히려 새벽보다 좀 더 크고 거칠었다. 마당에 나가니 옆집 김형이 잠을 못 잤다며 강아지 얘기를 했다.
“마티즈라나 뭐 말티즈라나 하는 애완견이에요. 딸이 키우던 걸 맡기고 갔다네요. 그걸 마당 개집에다 매어놓았으니...”
애완견 말티즈란 말을 듣고 보니 강아지 울음소리가 내 귀에 다르게 들렸다. 나를 사랑해줘요. 나를 안아줘요. 나를 이 불결한 개집에서 구해주세요. 어서 빨리 청결한 방안으로 데려가 주세요. 아,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요. 내 말을 좀 들어주세요. 왜 내 말에 끄떡도 않지요. 사람을 탓하듯 읍소하듯 그렇게 우는 소리로 들렸다.
오늘도 강아지는 하루 내내 울었다. 십 분도 쉬지 않았다.
할머니 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최대한 감정을 누그러 가지고 어른 몇이 할머니를 찾았다. 강아지가 어디 아픈가 보네요? 식사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요? 따님이 자식처럼 잘 키우셨나 봅니다. 기껏 그렇게 말했지, 강아지 울음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말은 모두 삼갔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렇다고 개를 방안에 들여 키울 수 없잖아.” 그 말만 하셨다. 옛날 분인 할머니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돌아서며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누렁이 강아지라면 하루 이틀 저러다가 말겠지만, 상대가 애완견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저렇게 저를 안아달라는데 바쁘신 할머니가 어떻게 그걸 안고 사실까. 말티즈는 더욱 나은 환경을 위해 생존의 비명을 지르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다.
쉬지 않고 앙칼지게 울어댈 때엔 한주먹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에 숨어있는 충동성을 다독인다. 말티즈를 맡기고 간 할머니 딸이 정말이지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