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자고 나니, 날벼락

자고 나니, 날벼락

by 강판권 교수 2016.07.11

가로수는 국가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 중 하나다. 가로수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되었지만, 가로수의 의미는 시대마다 달랐다. 고대사회의 가로수는 대부분 이정표 혹은 식용을 목적으로 심었지만, 근대 이후의 가로수는 쾌적한 도시, 시민의 휴식이 목적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가로수는 삶의 질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선진국에서 아름다운 가로수를 만날 수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가로수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다. 그러나 여전히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가로수에 대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가로수에 대한 철학은 가로수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해마다 가로수 관리에 필요한 예산을 편성하지만, 대부분 나무를 심거나 가지를 자르는 데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이후 심은 가로수는 대부분 플라타너스, 즉 버즘나뭇과의 양버즘나무였다. 그래서 양버즘나무는 우리나라 가로수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다. 최근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가로수로 심지만, 나무의 종류를 선택할 때도 신중하지 못하다. 가로수는 지역의 기후와 사회생태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만, 전국 도시의 가로수를 살펴보면 문제투성이다.
내가 사는 곳에도 양버즘나무 가로수가 아주 많다. 그중에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 가로수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지자체의 가로수 관리는 수준 미달이다. 가장 큰 문제는 수십 년 동안 자란 나무를 마음대로 다른 나무로 교체하거나 가지를 '과감하게' 잘라버린다는 점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집 앞 양버즘나무가 잎이 무성한 가지를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잘려버렸다. 내가 사는 곳은 덥기로 유명한 도시다. 양버즘나무 가로수는 공해에도 강하지만 잎이 아주 커서 그늘을 만드는데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졸지에 아름다운 가로수가 흉물로 바뀌어버렸다.
나는 양버즘나무의 가지가 잘린 뒤 길을 걷다가 까치집을 보았다. 그 전에는 잎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까치집이 가지가 잘리면서 드러난 것이다. 나는 길을 걷다가 발길을 멈추고 한참 동안 까치집을 바라보았다. 나무의 가지를 자른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까치는 어느 날, 아무 준비도 없이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만약 집 안에 새끼라도 있었다면 까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도대체 누굴 위해서 양버즘나무의 가지를 자른 것일까. 가지를 자르지 않으면 무슨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한여름에 그늘조차 없는 나무라면 심을 이유도 없다. 차라리 심지 않는 것이 관리도 필요 없고, 세금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가지가 잘린 양버즘나무 옆 인도에는 보드 블록을 교체하고 있다. 포크 레인으로 기존의 보드 블록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양버즘나무의 뿌리가 많이 잘렸다. 잘린 뿌리들이 길가에 뒹굴고 있다. 양버즘나무는 또다시 벼락을 맞은 셈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집 앞의 양버즘나무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리나라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가로수를 관리할 것인지 정말 걱정이다. 이런 수준이라면 결코 선진국에 도달할 수 없다. 선진국은 경제 수준만큼 문화 수준이 절대 기준이기 때문이다. 문화 수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 수준이다.